[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통합교육 현장을 가다]<中>페드로판-탈북청소년 닮은꼴
50여 년 전 쿠바 어린이들이 미국 마이애미에서 겪은 경험은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향한 탈북 청소년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안겨주겠다는 부모의 희생정신도 공통점이다. 새로운 사회에서 처음 부딪치는 문제도 비슷해 보인다.
바로 차별의 벽이다.
페드로판이 미국 마이애미에 도착해 캠프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미국에 쿠바 망명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과거 주변 아파트에 세워진 팻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No blacks, No dogs, No Cubans(흑인, 개, 쿠바인 출입금지).’
지금이라면 인종 차별 문제로 소송을 당할 일이지만 당시는 미국 사회 분위기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페드로판이 미국에 도착한 시기는 1960년 12월부터 1963년 10월까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국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민권법 법안에 서명했던 1964년 7월 이전이었다.
호세 에이절 마이애미대 교수는 “페드로판은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미국에 왔지만 당시 사회엔 차별과 편견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탈북 청소년들이 한국 학교에서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모습이 묘하게 겹치는 대목이다.
그에게 탈북 청소년이 북한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한국 사회에 철저히 동화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나은지 물어봤다. 그는 직접 답을 하는 대신 “여전히 나는 쿠바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 모두 40대이고 스페인어도 제대로 못하지만 쿠바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과 쿠바 같은 나라에선 정부가 모든 것을 해주기를 바란다”며 “하지만 자유 사회에서는 스스로 헤쳐 나가는 노력을 해야 동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탈북 청소년들이 북한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무조건 잊으려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가족에게 돈을 부치는 방식은 다르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차이가 없다. 탈북자들은 브로커를 통해 가족에게 돈을 보낸다. 쿠바에 있던 페드로판 부모들은 미국에 있는 친척을 통해 자녀들에게 간접적으로 돈을 전달했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는 반대로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페드로판 출신이 쿠바에 있는 부모에게 돈을 보내곤 했다.
물론 차이점도 많다. 페드로판과 달리 탈북 청소년의 대부분은 부모와 함께 한국을 찾아온다. 가족과 함께라는 점에서 페드로판 어린이들보다 좀 더 환경이 나은 셈이다.
아쉬움도 남는다. 에이절 교수는 “아버지와 함께 성인으로서의 진한 대화를 나눠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얘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끝내 쿠바를 떠나지 못했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동병상련 때문일까. 따뜻한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카르멘 로마나크 씨(68·여)는 “내가 마이애미에 처음 왔을 때 15세였다. 한국을 찾는 탈북 청소년들도 대략 비슷한 나이일 것 같다. 그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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