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부장 취임과 함께 71년 대통령선거대책도 활발해졌다. 공화당의 백남억 의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진만 원내총무, 김성곤 재정위원장과 백두진 국무총리, 박경원 내무부장관, 신직수 검찰총장,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당정청의 수뇌부가 참여하는 중앙대책기구가 만들어졌다. 회의 의장은 총리와 당 의장이 교대로, 간사는 중앙정보부장이 맡기로 했다. 강창성 중정 차장보는 이후락 부장을 따라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사항을 모두 강창성이 종합해 사후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육군 소령으로 중정에 근무 중이던 나는 강창성을 수행했다.
71년 1월 27일 궁정동 안가에서 첫 회의가 열렸다. 며칠 전부터 이후락의 지시를 받고 김영광 공작과장이 밤새 회의 자료를 준비했다.
“김대중의 자금봉쇄를 철저히 한다. 현재 약 3억 원이 확보돼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민당 유진산 당수와 갈라져 나와 이번 대선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이재형 씨와 그 계보를 탈당시켜 가칭 ‘국민당’에 합치도록 한다.”
“예비역 장군의 회유대책을 강구한다. 특히 혁명주체 유원식 장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이에 관한 대책을 공화당이 담당해 추진한다.”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 패배케 한 이후, 국회의원 입후보 등록까지 저지할 수 있는 방책을 사전에 강구한다.”
선거날짜도 중앙정보부가 택일했다. 강창성은 어느 날 3국 부국장 김성락을 불렀다. “김 영감이 유명한 집 알지 않소?” 김성락은 그날부터 며칠동안 출근도 거른 채 목욕재계하고 집에 모셔놓은 불상에 불공을 드리면서 정성을 모았다. 그리고 그가 스승으로 모시는 복술가에게 박정희, 김대중 두 사람의 성명과 사주를 주고 가장 좋은 날짜를 물었다. 김대중의 사주는 불명(不明)하여 애로가 많았다. 이름도 개명한 기록이 있고, 생년월일 또한 여럿이라 혼란스러웠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거일이 드디어 4월 27일로 정해졌다. 그날이 박 대통령에게는 길일(吉日), 김대중에게는 절명일(絶命日) 혼망일(魂忘日)이라 하여 선택한 것이다.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신민당 대통령후보 유세대회는 100만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최대로 성공한 집회였다. 이후 정권교체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앞으로 총통제가 채택되어 다시는 대선이 없게 될 것”이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청중의 반향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승세를 읽었음인지 “청와대에서 만납시다”라며 승리를 기정사실로 몰아갔다.
대선 일주일 전인 4월 20일 마지막 대책회의가 소집되었다. 백두진 총리가 얼떨결에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 얘기를 하며 “유사 이래 가장 많이 모인 것 같다”고 놀라움을 표했다. 내심 패배감을 표한 것 아닌가? 백두진은 옆에 앉은 이후락에게 무안을 당할 정도였다.
오후에는 실무소위원회가 소집되었다. 모두들 “이제 쓸 약이 하나밖에 없다. 박 대통령 각하가 ‘이번이 나의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다. 다시는 출마하지 않는다’고 선언해야 약발이 먹힌다”고 했다. 그러자 김창근 공화당 대변인이 말했다.
“그러나 과연 누가 방울을 다느냐가 문제입니다.”
설왕설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김창근이 다시 말했다. “각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치적 야심이 없는 이후락 부장과 백남억 의장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후락과 백남억에게는 또 누가 실무소위에서 나온 말을 전할 것인가를 놓고 서로 눈치를 보느라 회의는 계속 엉켰다. 사회를 맡고 있는 김상복 청와대 수석은 물론 강창성과 전재구 국장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김창근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론처럼 말했다. “각자가 알아서 오늘 회의에서 논의된 결과를 보고하는 방향으로 합시다.” 결론 아닌 결론을 내리고 헤어졌다. 나는 김창근의 말을 열심히 요약 정리해 강창성에게 주었다.
박 대통령이 과연 3선 이상 출마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우선 문제였다. 그분의 내심도 모르는 채 누가 방울을 다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야당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부정부패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공격의 대상이 누구인가? 대통령의 처남 육인수, 조카사위 장덕진, 경호실장 박종규다. 이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이는 선거대책회의 차원에서 논할 수준이 아니다. 그 이상의 선에서 단안을 내려야 할 문제였다.
강창성은 이후락 부장에게 실무소위의 회의 내용을 보고했다. 이 부장이 직접 박 대통령에게 건의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보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부장은 강창성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당에서 보고하든 말든 맡겨두시오.” 짐짓 태연했다.
이후락과 박정희 사이에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숙의가 있었음이 나중에 알려졌다. 이후락은 백남억이 그 얘기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 “남북이라는 말 빼” 이례적 회견 리허설… 이튿날 “평양 다녀왔습니다” 폭탄발언 ▼
꾀돌이 이후락의 기자회견
1971년 4월 22일 공화당의 마지막 유세도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있었다. 연단에 오른 박정희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민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이 박정희가 여러분께 표 달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훗날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이후락 씨는 나쁜 쪽으로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 점에서는 한국 현대사에서 그와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의 꾀를) 금방 알아듣고 연설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한 것이다.”
국민들은 “세 번 이상 출마하지 않겠다”는 박정희의 말을 ‘3선 후 은퇴’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후락의 꾀는 달랐다. 세 번 이상 출마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세 번 이상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듬해 유신헌법을 만들어 아예 선거를 없애버리고, 김대중의 예언처럼 ‘종신 총통’이 됐다.
‘꾀돌이 이후락’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다. 대선 이듬해인 1972년 7월 3일.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학교에서는 다음 날 있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특별 기자회견 리허설이 열렸다. 보통 예행연습 때는 부장이 직접 나타나는 일이 없는데 그날은 달랐다.
“시작하게.” 이후락의 지시가 떨어졌다.
“지금부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님의 남북관계에 대한 특별기자회견이 있겠습니….” 공보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후락이 버럭 화를 내며 말을 가로막았다.
“가만히 있어, 누가 자네보고 그렇게 말하라고 했어?”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계장으로 있던 이종찬의 기억. “이 부장이 여러 사람 앞에서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겁 많은 공보관은 주눅이 들어 말도 못하고 손에 든 각본만 쳐다봤다.
“내…내…내가 시키는 대로 해. ‘지금부터 기자회견이 있겠습니다’라고만 간단히 말해!” 이후락은 평소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이종찬도, 공보관도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기자들이 중앙정보학교 강당으로 몰려들었다. 이종찬의 경기고 동창인 MBC 형진한 기자가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사전에 알아야 방송이 나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이종찬도 내용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회견이 시작되었다. 공보관은 지시대로 간단하게 말했다.
이후락은 기자들을 한번 휙 돌아본 뒤 득의(得意)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자들은 “뭐? 평양?”이라며 대경실색했다.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락은 이런 충격요법을 노리고 공보관이 ‘남북관계에 관한 기자회견…’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날 이후 이후락은 톱스타가 되었다. 이종찬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누구도 2인자가 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간단한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을 이후락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깜빡 잊은 모양이다. 박정희의 심중을 가장 잘 아는 그가 김일성의 ‘영웅 칭호’에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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