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이후 5개월 넘게 심각한 기능부전 상태에 빠져 있다가 가까스로 정상화된 대한민국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은 체념 반, 분노 반에 가까울 것이다. 기를 쓰고 국민의 뜻에 역주행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진정한 민의(民意)의 전당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한탄을 해보기도 한다.
4년에 한 번씩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은 선량(選良)들이 모인 여의도 1번지는 벌써 19대 국회를 맞았다. 1948년 제헌국회가 열렸으니 66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도 갖는다.
첫 국회가 국회의원 200명을 배출한 이래 꾸준히 정원이 늘어 1988년 13대 선거 이후 299명(16대 국회만 예외적으로 273명)을 유지하다가 2012년 19대 선거부터 정원은 300명(비례대표 54명)으로 늘었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4년마다 100명이 넘는 초선의원이 탄생해 정치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의 여파 속에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과 17대 국회 임기 내 치러진 재·보궐선거를 통해서는 11대 총선(225명) 이후 최다인 206명의 초선의원이 나왔다.
역대 최고의 ‘슈퍼 루키’ 줄줄이 배출한 15대 국회
서로 다른 성장 배경과 이념 성향, 출신 지역을 가진 국회의원들로 4년마다 새롭게 구성되는 국회는 나름의 독특한 특징을 보였다. 13대 국회는 5공 비리 청문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청문회 등을 통해 국민에게 민주화를 실감할 수 있게 해줬고, 16대 국회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관련 뒷거래 의혹에 대한 특별검사를 임명해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현대의 5억 달러 대북송금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다소간의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상당수 정치전문가는 1996년 4월 총선으로 구성된 15대 국회를 가장 화려한 ‘인재의 산실’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여권에서는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 이완구 원내대표, 김문수 보수혁신위원장, 이재오 의원이 신한국당 의원으로 국회에 처음 입성했다. 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재선에 성공한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안상수 경남 창원시장이 ‘여의도 96학번’ 동기생이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부친인 남평우 의원의 작고로 치러진 경기 수원팔달 보궐선거(1998년 7월)를 통해 금배지를 단 뒤 같은 지역에서 내리 5선에 성공한 경우다.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신한국당 한나라당 총재 등을 역임하고 한나라당 후보로 두 차례 대선에 도전했던 이회창 씨도 15대 국회를 통해 민의의 전당에 입성했다.
대한민국 의전서열 1, 2위도 15대 국회의 산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998년 4월 보궐선거를 통해 현실정치에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정의화 국회의장은 부산 중-동 지역구에 처음으로 둥지를 튼 뒤 5선의 경력을 쌓아가며 국회부의장을 거쳐 올해 국회의장의 반열에 올랐다.
야권에도 ‘슈퍼 루키’가 즐비했다.
2001년 이른바 ‘정풍운동’을 주도하면서 열린우리당 창당과 노무현 정부 출범의 개국공신 역할을 했던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은 1996년 여의도 국회의 풋풋한 새내기였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을 지휘했던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전 공동대표, 정세균 추미애 의원도 당시 정치에 새바람을 일으킨 인물들이다. 작고한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15대 국회를 통해 ‘큰 꿈’을 키워온 사람이다.
‘혈액형’ 달라도 과감한 수혈
15대 국회가 향후 20년 한국정치를 쥐락펴락해 온 걸출한 인재를 수도 없이 배출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진영이나 이념(이른바 정체성), 과거의 경력보다는 잠재력이나 능력 본위로 새로운 인물을 발탁하려 했던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6년 선거 당시는 ‘3김 시대’가 종막(終幕)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다. 3당 통합을 통해 대통령이 된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새로운 인재의 영입이 필요했고, 1995년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자신의 네 번째 대통령 도전을 위해서는 총선에서의 승리가 절실했다. 김종필(JP) 자유민주연합 총재 역시 충청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 확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당시 정치권은 경향 각지의 인재를 끌어당기는 거대한 용광로 역할을 자임했고 각 정당 역시 오직 능력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인재 영입작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신한국당이 재야 노동그룹 인사였던 김문수, 이재오를 영입한 것은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었다. 장외투쟁과 병행해 제도정치권 내부에서도 기층 민중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며 만든 혁신정당이 바로 민중당이었으니 요즘 기준으로 치면 새누리당이 정의당 인사들을 전격 영입해 공천을 준 셈이다.
YS가 재임 중 안보정책 조정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다 얼굴을 붉히고 떠난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다시 끌어안은 것은 인재영입 작업의 백미(白眉)라는 평가가 많다. 이후 15대 국회의원이 된 이회창이 사생결단의 권력투쟁을 벌인 끝에 1997년 대선후보가 됐으니 YS로서는 호랑이 새끼를 불러들인 것을 크게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권도 전문가그룹 영입에 최선을 다했다. 신한국당 쪽이 박성범, 이윤성(이상 KBS 출신)과 맹형규(SBS 출신) 등 ‘스타 앵커’를 다수 영입한 데 자극받아 MBC 출신 정동영 씨를 대변인으로 충원했다. 당시 30대였던 젊은 판사 추미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출신 천정배를 영입한 것도 결과적으로 1997년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는 “15대 국회 당시만 해도 당 총재의 당권이 확고했고 대권주자들이 인재 영입을 통해 진부한 이미지를 깨고 수권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우수한 자원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108번뇌’ 17대 국회
하지만 활발한 인재 충원으로 일궈낸 국회의 르네상스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새정치연합 수도권 3선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불통이라고 비난하지만 정말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강경파”라면서 “같은 당 의원들끼리도 이야기가 안 되는 이런 현상은 17대 국회 때 생겨 전통처럼 돼버렸다”며 한숨을 쉬었다.
17대 국회에는 초선의원들이 대거 들어왔고 공교롭게도 그 초선들이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개원 당시 지역구 당선자 243명 중 초선의원은 133명(54.7%)을 차지할 정도로 대세였다. 이는 16대 국회 당시 지역구 초선의원 비율 38.8%보다 15.9%포인트 높은 수치였다.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새정치연합 전신)은 의원 152명 가운데 초선이 108명(71%)이나 됐다.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 탄핵 바람을 타고 국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탄돌이’라고도 불렸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던 386이 30여 명이었고 1970년대 운동권, 시민사회활동가, 관료 출신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젊고 싱싱한 사고방식으로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통해 국회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 국민이 적지 않았다. 17대 국회 초반에는 활발한 토론 문화와 왕성한 입법 활동을 보이며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정치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게 된 것도 초선들의 등장이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들은 “내 주장만이 옳다”는 독선의 모습을 보였다. 당론은 분열됐고 여야 관계는 적대감으로 가득해졌다. 정치권 내의 신구(新舊)세력 간 갈등이 본격적인 문제로 드러난 것도 17대 국회 때부터라는 지적이 많다.
선배 의원들을 구태로 몰며 우습게 보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의원은 “선배 의원들이 초선의 군기를 잡겠다고 하면 귀를 물어뜯겠다”며 노골적인 불신을 보이기도 했다.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목청을 높이는 이들 앞에서 당 지도부는 망연자실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04년 12월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국가보안법 폐지에서 한발 물러나 야당과 합의 처리하겠다고 하자 국회에서 240시간 농성을 주도한 것도 초선 40여 명이었다. 이들의 강경한 대응에 국가보안법 폐지는커녕 독소조항 삭제가 담긴 국가보안법 개정안도 물 건너갔다.
여야 타협에 공을 들였던 당시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이들의 농성을 두고 “과격한 상업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잘하면 이념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너무 피곤하고 맥이 빠진다”고 허탈해하기도 했다. 수적으로 30%도 안 되는 강경파가 당을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지만 때는 늦었다.
열린우리당 초선의원들은 목소리만 컸지 전략과 비전은 찾기 어려웠다는 비판도 들었다. 17대 국회에서 2007년 분당 사태를 겪을 때까지 3년여 동안 열린우리당의 당 대표(의장)는 9명이나 바뀌었다. 당 지도부의 리더십도 문제였지만 아예 귀를 닫고 목청만 열어 놓은 초선 ‘사공’이 너무 많은 탓도 컸다. 열린우리당 중진의원들은 당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초선 의원 108명을 ‘108번뇌’라고 불렀다. 신구 조화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참패하고 이듬해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초선 108명 가운데 공천을 통과해 재선에 성공한 의원은 35명에 불과했다. 대통령 탄핵 같은 바람은 다시 불지 않았다. 이때 재선에 실패한 17대 국회 초선의원 중 17명은 19대 국회에서 야당인 옛 민주통합당(새정치연합 전신) 소속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징검다리 재선’이라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노련하고 성숙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일부는 여전히 강경파로 분류되며 서슴지 않고 막말을 하기도 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의회정치 르네상스 맞으려면
15대와 17대 국회가 보여준 극명한 차이 속에 정치가 다시 한 번 인재의 용광로가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다. 시간이 갈수록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하는 입법부의 권한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재들의 진입을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더이상 국회가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비관론도 나온다.
박상헌 공간과미디어연구소장은 “과거 정치의 비중이 클 때는 지역구 공천이나 비례대표를 제안하면 각 분야의 ‘베스트’를 충원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며 “정치에 대한 불신, 입법권의 추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초선 영입을 통한 ‘새로운 피’의 수혈도 중요하지만 다선의원들의 역량 강화를 통해 입법 권력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회정치라는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나 지식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농익은 경험이 묻어나는 현인들의 전당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김민전 교수는 “17대 국회 이후 진영 간 대결이 강화되면서 의회에 대한 평가도 급전직하한 것이 사실”이라며 “미국 정치가 대통령을 변화의 상징으로 삼지만 의회는 그 변화의 완급을 조절하는 경험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을 참고할 만하다”고 말했다.
국회입법조사처장을 지낸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최근 들어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공천권을 가진 사람의 입맛에 맞는 사천이 공공연히 자행됐다”며 “의원들의 연륜이 살아 숨쉬고 전통에서 나오는 정당성이 지배하는 의회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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