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권 관계자들을 만나면 국정 현안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도 말수가 줄어드는 대목이 있다. 바로 인사다.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것 같지만 그 힘은 인사권에서 나온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에선 인사권이 실종됐다. 정부 부처, 공공기관, 공기업 할 것 없이 수개월째 빈자리가 수두룩하다. 국정 곳곳에 ‘인사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10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천기 아닌 천기’를 발설했다가 여당 의원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한국전통문화대 총장 임명이 7개월째 이뤄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위(청와대)에서 허가가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 것. 나 청장은 뒤늦게 “(청와대가) 인사 검증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수습에 나섰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새누리당 한선교 의원은 “그렇게 대답하면 큰일 난다. 말씀을 조심해서 하라”고 질책했다.
인사 난맥의 가장 큰 원인은 인사권을 틀어쥔 청와대가 기민하지 않은 탓이다. 7월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실이 신설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인사 동맥경화 현상은 급기야 권력 내부 ‘암투설’로 번지고 있다. 비선 라인이 등장하고, ‘인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의 최근 인사 난맥은 이런 의혹에 불을 댕겼다. 새로 임명된 총무국장이 10여 일 만에 경질되는가 하면, 이헌수 기획조정실장이 ‘위’의 뜻에 따라 사표를 냈다가 논란이 커지자 반려되는 소동도 빚어졌다. 국정 전반이 인사 난맥상에 빠졌다. 》
▼ ①한체대 총장, 정부 출범후 내내 공석 ▼
亞문화개발원장도 17개월째… 권력 암투설-비선 개입설 번져
설마 하겠지만 19개월째 공석인 자리도 있다. 박근혜 정부 집권 기간 내내 비어 있었다는 얘기다. 한국체육대 총장이 그렇다. 김종욱 전 총장은 지난해 3월 물러났다. 이후 한국체육대는 선거를 통해 내부 교수 출신과 조현재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 등 4명을 잇달아 총장 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모두 교육부의 인사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탈락했다. 외부 인사까지 총장 후보에서 탈락하자 한국체육대는 손을 놓은 상태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3년여 앞두고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산실이 방향을 잃었다.
평창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국제경기 파트 부위원장도 3개월 넘게 공석이다. 직제까지 바꿔 부위원장 자리를 신설해놓고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계는 더욱 심각하다. 김종덕 문체부 장관이 8월 취임하자 문체부 산하 기관들은 안도했다. 당시 무려 7곳의 기관장이 공석이거나 임기가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장관이 취임한 지 50일이 지났지만 인사는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현재 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TV), 아시아문화개발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국립오페라단 등 산하 기관 4곳은 최대 17개월까지 기관장 공백 상태다. 또 영화진흥위원장은 올해 3월 말, 영상물등급위원장과 한국저작권위원장은 6월 말 임기가 끝났지만 후임자가 없어 자리만 지키는 ‘시한부 위원장’이다. ▼ ②관피아 논란에 공공기관장 올스톱 ▼
강원랜드 정치외압 겹쳐 사태 악화… 주택금융公-항만公도 인선 중단
공공기관 인사에 제동이 걸린 것은 세월호 참사와 무관치 않다. 통상 부처 산하 기관이나 공기업 임원 자리는 퇴직 공무원이나 정권 창출에 기여한 정치권 인사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관(官)피아’ ‘정(政)피아’ 논란 등이 확산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고민도 깊어졌다.
강원랜드의 인사 난맥상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올해 2월 최흥집 전 사장이 강원도지사 출마를 위해 사임하면서 사장은 8개월째 공석이다. 김성원 전 부사장마저 배임 혐의로 4월 물러나면서 강원랜드는 경영진 공백 상태를 맞았다. 하지만 강원랜드는 사장에 앞서 부사장 선임 작업에 먼저 들어갔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인선 작업에 대해 강원랜드 노조는 “6·4지방선거에서 떨어진 새누리당 후보를 사장에 선임하려는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그렇다고 부사장 선임이 신속히 이뤄진 것도 아니다. 옛 지식경제부 국장 출신인 강원랜드 경영지원본부장이 부사장으로 임명될 것이 유력했지만 관피아 논란과 노조의 반대로 무산됐다. 다시 공모 절차를 밟아 7월 말 부사장 후보를 2명으로 압축했지만 두 달 넘게 최종 후보를 정하지 못했다. 사장 공모는 이달 초 끝났다. 친박(친박근혜)계로 통하는 함승희 전 의원과 2010년 강원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엄기영 전 MBC 사장 등이 후보군에 포함됐지만 최종 선임까지는 갈 길이 멀다.
관피아 논란으로 인선이 중단된 곳은 수두룩하다.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은 올해 1월 이후 공석이다. 당시 기획재정부 관료 출신의 내정설이 돌았지만 정부가 관료 출신 배제 원칙을 내비치면서 인선은 올스톱됐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직이 4개월째 공석인 것도, 울산항만공사 사장직이 3개월째 비어 있는 것도 관피아 논란과 무관치 않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 ③낙하산-들러리 시비… 구태 여전 ▼
파다한 내정설에 공모제 무용론… 적임자 못찾아 장고끝 惡手도
곳곳에서 ‘인사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잡음은 점점 커지고 있다. 당장 공모제 무용론이 확산되고 있다. 인사가 지연되는 곳마다 누가 정권 실세의 동아줄을 잡았다는 ‘내정설’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8월 사장 임기가 끝난 인천항만공사의 경우 사장 공모 신청이 13일 마감됐다. 하지만 공모 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2012년 총선 당시 새누리당으로 인천 지역에 출마한 A 씨가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인사는 인사대로 늦어지면서도 적임자를 찾지 못하는 ‘장고 끝 악수(惡手)’ 패턴도 반복되고 있다. 바로 ‘보은(報恩) 인사’ 논란이다. 10일 우리은행 감사위원에는 친박연대 대변인으로 활동한 정수경 변호사가 선임돼 ‘낙하산 논란’을 빚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직 공모를 두고는 ‘꼼수 인사’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전임 이사장이 물러난 뒤 반년 가까이 공모를 하지 않던 공단은 올해 2월 28일 공모 절차를 밟아 현 이창섭 이사장을 선임했다. 문제는 이 이사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피선거권이 박탈돼 2월 11일까지는 공모에 응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이사장은 박 대통령의 지역 대선조직을 이끌었다.
공공기관이나 공기업만 인사 지체가 심각한 게 아니다. 정권 최고 실세로 통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조차 인사를 제때 못하고 있다. 현재 기재부에는 1급만 다섯 자리가 비어 있다. 특히 현 정부의 최대 중점 추진 분야 중 하나인 공공기관 개혁 업무를 담당하는 재정업무관리관 자리가 두 달 넘게 공석이다. 이 때문에 공공기관 개혁의 추진력이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인사 수요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인사수석실을 중심으로 인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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