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情 과장이상 전원 사표내라”… 전두환 지시에 모두 철렁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8일 03시 00분


[憧憬 이종찬 회고록]〈9〉전두환의 중앙정보부



1980년 8월 18일 263일간의 대통령 권한대행 및 제10대 대통령직을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오른쪽).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그를 환송하고 있다. 동아일보DB
1980년 8월 18일 263일간의 대통령 권한대행 및 제10대 대통령직을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오른쪽).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그를 환송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은 언론에서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가 4월 14일 오후에야 일제히 보도가 터져 나왔다. 부내에서는 일순 깜작 놀라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기조실의 지시에 따라 각 부서는 인계인수서 작성, 신임 부장에 대한 현황보고 작성 등 완전 비상이 걸렸다.

4월 15일 전두환 장군이 부장서리로 취임하였다. 사복 차림의 전 장군은 취임식장으로 걸어들어오는 내내 웃음기 없는 굳은 표정이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단상의 부서장 자리는 모두 치워졌다. 부장 자리와 윤일균, 전재덕 두 차장이 배석할 자리만 마련되어 있었다. 취임사는 짧고 간결하였지만 듣는 이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20여 년간 국가보위를 위하여 수고가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보부는 월권과 이권으로 인하여 지탄받은 사람이 많았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부장 직에 있었던 자가 외국에 나가서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고, 국내에서 국가원수를 시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하여 자성하는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음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앞으로 정보부는 사바크(SAVAK)가 되지 말고 모사드(MOSSAD)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나의 개혁보고서에 들어간 말이었다.)

“앞으로 내부정비를 해 나가야겠다. 다행히 높은 교육과 훈련을 받은 젊은 요원들이 많다고 듣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부의 개혁을 기대한다.”

강한 톤의 인사말을 듣고는 부서장 이상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특히 단상에 있었던 윤 차장의 얼굴은 일순 흙빛으로 변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조직개편 및 인사작업을 하느라 바빴다.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도 차장이나 차장보, 그리고 국장에게 알리지 못한 채 숨어서만 작업을 해야 했다. 철저한 이중생활이었다.

전두환 부장서리 임명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미국 국무부의 리치 과장은 즉각 못마땅하다는(displeasure) 반응을 보였다. 백악관에 근무하고 있던 한국전문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CIA거점장은 의아심을 표했다.

나는 전두환 부장 겸직에 대한 미국 측의 반응이 부정적일 것이라고 이미 예상했었다. 그래서 정보협력관 최연호 대령에게 부장의 취임사를 사전에 미 대사관 CIA거점장 브루스터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내가 노렸던 것은 취임사를 읽어보면 현재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미국의 CIA처럼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려 한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정보부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온 기관을 개편하려면 계엄군이 나서서 단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점을 미국 측에 이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부의 개편 방향은 단일차장 밑에 10개 내외의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국가정보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정보부가 국내정치에서 손을 떼게 하려면 차장을 국내, 국외로 따로 둔다는 것부터 시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혐오했던 국내 부서는 ‘소(小)정부’ 소리를 들을 만큼 국내 제반 사항을 좌지우지하고 무한권력을 행사했던 판단기획국이었다. 그리고 정치사찰과 수사를 전담하는 보안수사국이었다. 이 두 부서를 대표적으로 정리해야만 했다. 보안차장보와 판기국은 정치인 조정의 본산이었다. 나는 과거 현역 정치인, 국회의원들이 차장보나 국장들을 찾아와 아양을 떠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10·26사건 때도 정승화 참모총장을 초대하여 안가 부근에서 저녁을 먹으며 붙잡고 있던 사람이 바로 보안차장보 아니었던가?

보안수사국은 악명이 높기로 유명했다. 1971년 공화당의 소위 10·2 항명파동 때 김성곤, 길재호 같은 당의 중진들이 줄줄이 묶여 들어와 혼쭐이 나고, 강제로 국회의원직 사표를 쓰도록 한 곳이 바로 여기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개편 방향은 안보에 중대한 안테나 역할을 해야 할 국제정보나 대북정보는 더욱 강화하고, 국내의 사찰기능은 약간의 필수적인 수집기능만 남기고 과감하게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전두환 부장이 취임한지 일주일이 되어서야 개편안이 대충 성안되었다. 전 부장은 즉각 두 차장을 불러서 10·26사건에 책임을 지고 일단 과장급 이상 전원의 사표를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이 말이 부내에 확 퍼지자 정재열 부국장은 불평했다.

“10·26사건에 직접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부장을 잘못 모신 책임을 지거나 도의적으로라도 윗분들이 사의를 표했어야 옳았는데 꿀단지처럼 끼고 있다가 과장들까지 책임을 묻는 사태를 빚게 되었네요. 한심한 일입니다.”

전두환 부장은 개편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갔으나 최규하 대통령은 양(兩) 차장제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전두환 부장의 복안은 합참본부장으로 김재규 재판에 공로가 많은 김영선 장군을 차장으로 하는 단일 차장 안이었다. 그런데 최 대통령이 서정화 내무부 차관을 차장으로 기용하라고 지시해 부득이 두 사람을 각각 해외담당 차장, 국내담당 차장으로 나눌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짓자 눈치가 빠른 전 부장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얘기했다.

“이종찬! 이상도 좋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고려해야지, 안 그래?”

▼ 최규하 前대통령 ‘1980년 의문의 행적’ ▼

“서정화를 中情 국내담당 차장에 앉히라”… 崔, 그렇게 빨리 하야하게 될 줄 몰랐던 듯


2006년 최규하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빈소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어떤 기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이 (1980년의 하야 과정에 대해)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가셨는데 고맙지 않습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답은 이랬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굉장히 섬세하고 꼼꼼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뒀을 것이다. 머지않아 회고록이 됐건 비망록이 됐건 발표되지 않겠나?”

하지만 비망록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 비망록을 추적했던 동아일보 김정훈 기자(현 사회부장)는 최규하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정말 허탈한 얘기를 들었다. 1988년 조남호 마포구청장이 인사차 최규하 전 대통령의 서교동 자택을 방문했는데 그 자리에서 최 전 대통령은 “4년 전 망원동 수재 때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귀한 자료를 많이 (망쳐)버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기록은 대부분 수성사인펜으로 쓴 탓에 지하 창고에 들어찬 물로 모두 젖어버려 읽을 수 없게 됐다는 얘기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김정훈 기자가 조남호 전 구청장으로부터 이 사실을 ‘우연히’ 들은 것이 아니라 최규하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그 측근은 김 기자에게 직접 대놓고 밝히기보다는 “(비망록 문제는) 조남호 구청장이 잘 알 것”이라는 식으로 슬쩍 귀띔하는 형식을 취했다. 왜 그랬을까? 그냥 없다고 밝히면 그뿐일 텐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빈소에서 ‘최규하 비망록’ 얘기를 한 셈이다. 어쩌면 ‘1980년 상황’에 관한 한 최규하,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은 서로 주고받을 게 없을지도 모른다. 악연은 분명 악연이지만….

그만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행적엔 의문점이 많다. 이종찬의 짐작. “아마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이 비상대권을 쥐게 되는)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가 그렇게 급속하게 이뤄질 줄은 모르고 내심 (유신)헌법을 개정한 뒤 대통령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1988년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에서 “아버님이 말년에 최규하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고 밝힌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영시(零時)의 횃불’이라는 제목으로 전기를 출판한 김종신 전 부산문화방송 사장의 증언도 비슷하다. 박 전 대통령이 1975년 말 최규하 국무총리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나도 이제 피곤하다. (대통령) 넘겨줘야지. 원래는 김종필한테 넘기려고 했는데 너무 설쳐대서 최규하한테 넘겨주려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신동아 2011년 11월호)

물론 박 대통령이 1978년 7월 유신 2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에는 JP(김종필)를 염두에 두고 후계구도를 짜고 있었다는 김정렴 전 비서실장(1969.10∼1978.12)의 회고록도 있다.

증언이 엇갈리긴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들고 온 ‘김영선 단일 차장’안을 물리치고 서정화 내무차관을 국내담당 차장으로 앉히라고 지시한 걸 보면 그냥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이종찬 회고록#전두환#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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