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갑질 막아줄… 우산이 필요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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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에 뿌리박힌 갑을관계 (下) 이렇게 뿌리 뽑자

《 “고객이 왕이라는 말도 몰라? 왕한테 말대꾸 하는 너는 회사 다닐 자격이 없어!” A 씨는 114 전화번호 안내서비스를 하는 KT 자회사 KTcs의 ‘관심고객’이었다. 지난해 4월부터 3개월 동안 A 씨는 114에 1600차례 전화를 걸어 매번 여성 상담원만 골라 욕설과 음담패설을 일삼았다. 》  
KTcs는 A 씨를 성희롱 및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다. A 씨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성폭력 예방교육 40시간을 명령받았다. KTcs가 A 씨를 신고할 수 있었던 것은 ‘악성민원매뉴얼’을 만들어 대처한 덕분이다. 악성민원전담팀과 법무팀에서 대응 방안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KTcs 관계자는 “악성민원매뉴얼이 생기기 전까지 성희롱 폭언 등 악성민원은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 ‘피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기업들

갑을(甲乙) 논란에서 서비스 직군 종사자는 ‘을 중의 을’로 꼽힌다. 소비자가 왕이란 통념 아래 이들은 늘 웃음과 친절로 무장한 신하가 돼야 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부당한 갑질을 당해도 호소할 곳이 없다.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당해도 전화를 끊거나 자리를 피하는 일은 금물로 여겨졌고 끝까지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최근 갑을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으면서 이들에게 ‘피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기업이 늘고 있다. 무조건적인 친절이 갑질을 더 부추긴다는 판단에서다. KTcs도 악성민원매뉴얼을 만들어 강경 대처를 시작한 뒤 악성민원이 20% 가까이 줄었다.

서울시 120 다산콜센터도 지난해부터 상담사 감정노동 문제 해소 및 규제 방안을 만들었다. 악성민원에 대해 ‘3번 경고→경고문 발송→고소·고발 조치’ 등 단계적으로 대응한다. 성희롱 등 명백한 위법행위를 하면 경고 없이 바로 법적 처벌 또는 제재를 하는 ‘원스트라이크아웃제’도 시행 중이다.

아시아나항공도 최근 직원보호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승무원들에게 습관적으로 행패를 부리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을 별도로 관리하고 ‘운송거절가능 고객’임을 통보한다.

박주영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직원들이 부당한 대우에 적극 대응할 방안을 기업들이 직접 마련해 보호하는 것이 갑의 횡포를 막는 효과적 방법”이라고 말했다.

○ ‘라면상무 사건 1년’ 제도적 대책 마련 위한 노력

한국 사회에서 ‘갑을 관계’라는 종기가 곪아 터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다. ‘라면 상무’ ‘신문지 회장’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을의 지위에 놓인 사람에게 ‘갑질’을 한 사실이 알려져 문제가 됐다. 또 기업과 기업 사이 갑질 문제도 잇따라 터졌다. 대리점 사장에게 제품을 받으라며 폭언을 한 사례가 공개돼 공분을 샀고, 밀어내기에 견디지 못한 대리점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이후 갑을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소하려는 다양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및 납품단가 조정 협의제도가 대표적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불공정 행위를 한 대기업에 소비자나 중소기업이 입은 피해액보다 훨씬 많은 손해배상금을 물리는 제도다. 지난해 5월 개정된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는 부당한 하도급 대금 인하, 부당한 발주 취소, 부당한 반품 등에 대해 최대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중소기업협동조합이 개별 중소기업을 대신해 원청 사업자와 직접 납품단가를 조정해 협의할 수 있도록 한 ‘납품단가 조정협의제도’를 지난해 11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가격 협상력이 낮은 개별 중소기업이 납품단가 조정 과정에서 입을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올해 말부터는 중소기업청 산하 ‘중소기업 기술분쟁 조정 중재위원회’가 설치돼 운영된다. 기술을 탈취당한 기업이 위원회에 중재 조정을 신청하면 약 50명의 전문가들이 신속하게 중재 조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기술 탈취에 대한 신속한 판단으로 막대한 소송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조정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 스스로 검열하는 문화 동반돼야


직원들 머릿속에서 ‘갑’이라는 인식을 지우기 위해 노력 중인 대기업들도 있다. 현대백화점은 3500여 개 협력사와 체결하는 모든 거래 계약서에 ‘갑’과 ‘을’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 임직원을 대상으로 예절교육까지 실시할 예정이다. 한국야쿠르트는 영업 일선에서 뛰는 ‘야쿠르트 아줌마’와 계약을 할 때 아줌마를 ‘갑’으로 표기하고 있다.

오세조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제도적 뒷받침은 필수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나도 을이 될 수 있다’는 인식과 인간적인 반성이다”라며 “계급장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검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도 공무원의 부당한 횡포를 막기 위한 갑을관계 청산 10대 행동강령을 마련했다. 인허가 권한을 쥔 공무원이 민원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다. 시는 각종 공문서에서 갑과 을이라고 쓰던 관행도 없애 갑은 그냥 서울시 또는 발주기관으로, 을은 ‘계약 당사자’로 쓰고 있다.

국내 한 게임회사에 근무하는 박모 상무는 “최근 ‘여러분은 회사 안에서만 임원이고 상사이지 밖에선 임원이 아니다’란 사내교육을 수시로 받고 있다”며 “‘갑’의 지위에 젖어 밖에서 돌출행동을 할 위험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일 dong@donga.com·최예나·김호경 기자
#갑#을#골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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