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개정안에 관한 브리핑 내용은 상당히 깊이가 있었다. 일견, 오랜 기간 연구했던 듯했다.
우선 대통령의 임기는 토론과정에서 ‘4년 1차 중임’이 타당하다는 반론이 있었으나 자유당과 공화당의 불행한 정치사에 대한 국민감정을 감안해 단임으로 하는 것으로 확정했다. 단임에 대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대신 그는 임기를 6년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후에 7년으로 바뀌었지만 당초 작업 단계에서는 6년이었다.
문제는 선거방식.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이견이 개진됐다. 특히 허화평 대령은 직접선거를 통해 민주적 절차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태우 장군은 간선제를 고집했다. 허 대령은 4년에 한번쯤 카니발을 하는 것이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반론을 폈으나 전 부장이 제지해 토론은 끝났다. 안전한 간선제로….
신당조직도 서둘러야 했다. 특히 가장 관심을 두어야할 지역은 서울과 전남, 전북이라고 전 부장이 특별히 강조했다.
1980년 7월 24일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리고 광주문제도 일단락되어 사회는 전반적으로 무겁지만 평온을 되찾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당 창당 팀은 가속 페달을 밟았다. 먼저 프로급 정치인을 영입키로 했다. 그 가운데 노태우 장군은 김창근 전 공화당정책위의장을 강하게 추천했다. 그는 “김창근은 금진호와 절친한 사이로 학식과 행동이 겸비된 정치인”이라고 칭찬했다. 아마 은밀히 만나 본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사람은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김창근은 당초 JP파였다가 4인체제로 넘어갔다가 또 세상이 바뀌니 다시 JP에게 돌아간 권력지향 출세주의자 아닌가? 그런 출세주의자를 다시 기용한다는 건 새 정치가 아니다.” 이런 나의 주장으로 그는 창당과정에서 제외됐다.
김창근은 몇 년 후 YS 쪽으로 접근했다.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인물은 남재희였다. 그는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공화당 의원을 지냈지만 대학시절에는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의 서울대 법대 편입을 앞장서서 강력하게 저지할 정도로 정의감이 있었다. 말하자면 사고는 진보적이나 보수쪽 정당에도 입당할 만큼 행동폭이 넓은 정치인이요, 언론인이었다.
나는 남재희를 만나자마자 곧 의기투합했다.
사람들을 인선하는 과정에서 남재희와 나는 과거 재야 세력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우선 독립운동 원로 가운데 한 분을 모시기로 했다. 자연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오래 옥고를 치른 유석현 선생으로 압축되었다.
할아버지의 동지이기도 하셨기에 나는 규창 숙부님을 앞세워 서울 사직동 근방 여관에 자리 잡고 있던 유 선생을 찾아뵈었다.
“이번에 저희들이 과거 진부한 정객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물들을 각계에서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나는 일본 놈 세상에서도 요시찰이고, 자유당 때도 요시찰이고, 박정희 때도 요시찰인데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바로 그 점 때문에 모시려는 것입니다.”
남재희는 나름대로 서울지역 선거구도를 가상하여 인물들을 천거했다. 김정례, 윤길중, 오유방, 이세기, 윤식, 노재봉, 이태섭 등등. 그는 서울은 지명도가 우선 높아야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상당수를 공천했다.
조직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 중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당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8월 전두환 부장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갑자기 청와대에서 운경 이재형 선생을 모시는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권정달은 나에게 이재형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 대로 그에게 설명했다.
“운경 선생은 제헌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정치 원로지요. 그는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약관의 나이로 상공장관을 지냈고, 족청파로 꼽혔으며, 이범석 장군과 굳은 동지적 관계가 있는 분입니다. 이범석 장군이 이승만의 자유당에서 거세당하자 그도 야당으로 돌아섰고, 한때 야당 내에서 유진산계와 양립하는 파벌을 리드했습니다. 그러나 유신시대가 오자 그는 정계를 사실상 떠나서 재야에 묻혀 있었습니다.”
나는 운경 선생을 대표로 모시는 문제에 적극 찬동했다. 그분은 노선과 철학으로 정치를 시작했지, 국회의원을 하기 위해 정치를 하지 않았다.
또한 개인적으로 그는 대림산업을 창립한 이재준의 형이고, 나의 친구인 이준용 군의 백부였다. 권정달은 나에게 이재형 씨를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즉시 이준용 군에게 사정을 말하고 중개를 부탁했다.
9월 4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이준용 군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권 처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각하께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당을 창당하려는 의지가 굳으신데 사실 우리는 정당을 잘 모르고 또 앞으로도 선생님 같은 어른들에게 지도를 받아야 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운경은 의외로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요새 국제정세도 대단히 복잡해서 나라의 장래가 정말 걱정되는군요.” 말을 돌린다. ▼ 이재형 민정당대표 영입 설득해놓고… “나 이사람, 창당엔 관여 안했습니다” ▼
술에 물 탄듯… 노태우 스타일
“(민정당) 창당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한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이재형 씨를 대표위원으로 영입하는 데 역할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러고는 이재형 대표 영입 과정에서 자기가 한 역할을 간략히 기술했다.
“대표위원을 구하기가 힘들었던지 전 대통령은 내게 ‘이재형 씨가 어떻겠는가? 정치에서 손을 뗀 지 10년이 넘었지만 중량감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다만 성격이 까다로운 양반이니 노 장군이 만나 설득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만나보니 듣던 대로 성격이 치밀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분이었다.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기대를 걸어도 좋을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시간여의 대화가 오갔을까. 이재형 씨는 ‘비록 몸은 늙었지만 꼭 필요로 한다면 이 한 몸을 아끼겠습니까?’라면서 승낙을 해주었다.”
그렇지만, 민정당 창당 과정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보안사령관이 주재하는 신군부의 헌법개정안 검토회의에 참여한 것이라든지, 동서인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과 가깝다는 김창근을 추천한 얘기 등을 ‘직접 관여’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 오래전의 그런 ‘실무적이고 부차적인’ 이야기들은 아예 기억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종찬 씨는 노 전 대통령이 “민정당 창당에 직접 관여한 일이 거의 없다”고 한 데 대해 납득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권정달 처장이 노태우 장군에게도 보고하라고 해서 (창당 작업을) 모두 보고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딱하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이종찬의 입장에서 볼 때, 노태우는 악연이었다. 훗날 여소야대에 몰린 노 전 대통령이 민정, 민주, 공화 3당의 합당을 선택하고, 이어 김영삼(YS) 민자당 대표가 여당의 차기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 이종찬이 생각하는 악연은 극에 달한다.
YS에 맞서 후보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이종찬은 ‘노심(盧心·노 대통령의 심중)’이 궁금했다. 노 대통령이 내부적으로 이미 YS 지지를 약속했기 때문에 자기가 경선에 나가봐야 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이라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고심 끝에 이종찬의 부인이 노 대통령의 부인인 김옥숙 여사를 찾아갔다. 윤장순 씨는 김옥숙 여사의 여동생(금진호 전 상공장관의 부인)과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김옥숙 여사와도 ‘친구의 언니’로 알고 지내는 터였다.
윤장순은 대통령 부인 김옥숙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 달라. 정말 (차기 후보 자리는) 김영삼 대표에게 주기로 했느냐? 우리는 지금 너무 고통스럽다.”
그러나 김옥숙의 대답은 더 답답했다. “금진호 장관이 김영삼 대표 얘기를 많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을 정한 건 아니다. 정 힘들면 이 의원도 ‘내가 낙점을 받았다’라고 해라.”
윤장순은 “그걸 누가 믿겠느냐? 이 의원만 우스운 사람 된다”고 되받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부부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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