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바벨탑, 평양의 아파트

  • 동아닷컴
  • 입력 2014년 12월 7일 09시 41분


사회주의 북한 자본주의 재화의 상징…분양에서 거래까지 돈이 지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군사 퍼레이드의 주요 무대인 김일성 광장 뒤로 곧게 뻗은최신식 아파트. 흡사 서울 강남이나 부산 해운대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단지를 연상케 하는 흰색 빌딩군(群)은 밤이 되면 휘황한 조명으로 화려함을 더한다. 북한이 평양 창전거리에 2012년 6월 건설한 최고 45층 높이의 만수대 아파트다.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뒤로하고 북한의 실력자 가운데 한 명인 최부일 인민보안부장이 눈물을 찍어내는 주민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2013년 5월 평양 평천구역 신축 아파트 붕괴 사고. 두 달 뒤에는 평양 위성도시인 평성 구월동의 7층짜리 아파트가 완공 2년도 되지 않아 무너졌고, 올해 10월 중순에도 짓고 있던 38층 아파트 일부가 붕괴돼 작업하던 인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평양 신규 아파트 10만 달러

평양의 아파트는 모순적인 존재다. ‘사회주의 강성대국’ 이미지를 만방에 과시하는 상징물이자, 부실한 기술 수준과 통제력을 잃어가는 공권력을 폭로하는 증거물이다. 이 기묘한 아이러니 속에는 모든 재화를 국가가 소유한다는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그 위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시장경제라는 현실이 있다. 신분의 특권이던 아파트가 돈으로 사고파는 재화가 된 부동산시장의 아찔한 질주, 허울만 남은 계획경제와 반(半)공식화된 뇌물 시스템을 배경으로 달러를 긁어모으는 북한의 ‘초기 자본가 그룹’의 존재가 이 아이러니의 결과물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북한의 아파트에 이미 지역별로 그 나름의 시세가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혜산이나 회령 같은 북·중 접경도시에서는 새 아파트가 3만~4만 달러, 함흥이나 원산 등 지방 대도시에서는 1만~3만 달러다. 평양의 경우 신규로 분양하는 아파트의 평균 가격은 10만 달러 이상이다. 한국의 1990년대 초반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가격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아파트가 거래된다는 미스터리를 풀어줄 열쇳말은 ‘국가살림집리용허용증’(통칭 입사증)이다. 공식적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은 도시경영사업소에서 발행하는 입사증을 받아 지정된 아파트에서 거주한다. 소유권 아닌 사용권에 불과하지만, 한 번 받으면 사실상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한때는 당 간부 등 특권 계층의 전유물이던 신규 아파트 입사증이 바로 부동산시장에서 실제로 거래되는 ‘물건’이다. 평양 입사증 1장의 가격이 10만 달러라는 뜻이다.

탈북자에 따라 조금씩 설명이 다르지만, 이러한 거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로 보인다. 굶주림에 시달린 주민들이 가재도구를 모두 팔아 치우고 나면 헐값에 입사증을 넘겨주고 거리로 나앉던 시절, 입사증을 구매한 사람이 다시 도시경영사업소 담당자에게 적당한 뇌물을 찔러주고 명의를 바꾸는 식이었다.

그러나 한 번 만들어진 시스템은 급속도로 번식했다. 특히 7·1경제관리개선조치 등으로 각 기업소와 개인의 경제 활동이 상당 부분 자율화된 2000년대 후반 들어 거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북한 당국이 ‘인민생활 개선’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평양 등 주요 도시에 대규모로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시점과 고스란히 맞물린 것. 입사증 거래는 대표적인 수익사업으로 떠올랐고, 아예 짓지도 않은 아파트를 미리 사고파는 선분양 방식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평양의 아파트는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에 대규모 건설 붐을 겪었고, 이는 200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 공통점은 한 가지, 후계체제 구축이다. 창전거리 아파트 같은 전시성 고급 아파트는 ‘스카이라인’을 중시하는 평양의 도시건축 철학에 고스란히 맞아떨어진다. 외신 사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세련된 단지 이미지를 통해 후계권력의 정통성을 과시하겠다는 의도다.

최고지도자의 특각 등 국가건축물을 주로 설계해온 백두산건축연구원이 아파트 설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 역시 이 무렵부터다. 박사급 설계자만 수십 명으로, 북한 최고 설계 실력을 자랑하는 이 연구원은 최근 들어 중국은 물론 남한 TV나 영화에 등장하는 아파트까지 참조해가며 건물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대도시에서 유행한 크고 둥근 베란다 형태가 창전거리 아파트에 적용된 것이 대표적이다.

2008년 북한 당국은 ‘평양 살림집 10만 호 건설’을 발표하고 2012년까지 완수하겠다며 의욕적으로 밀어붙였다. 건설 원가를 1만 달러로만 계산해도 우리 돈으로 1조 원이 넘나드는 엄청난 규모다. 문제는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공사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 자본과 자재가 피폐해진 북한 당국 주머니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장마당과 밀무역으로 자금 모집


최부일 북한 인민보안부장이 5월 13일 발생한 평양 평천구역 신축 아파트 붕괴사고 현장에서 희생자 유가족 등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AP통신은 이 집회가 5월 17일 열렸다 고 밝혔다.
최부일 북한 인민보안부장이 5월 13일 발생한 평양 평천구역 신축 아파트 붕괴사고 현장에서 희생자 유가족 등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AP통신은 이 집회가 5월 17일 열렸다 고 밝혔다.
이 때문에 중앙당과 최고인민회의는 10만 호를 평양의 주요 권력기관에 배분했다. 북한에서 흔히 ‘와크’라고 부르는 강제할당량이다. 예산이나 노동력은 각 기관이 알아서 조달해야 하지만, 채우지 못하면 기관장은 숙청이나 좌천을 피할 수 없다. 곤혹스러운 간부들은 장마당과 밀무역을 통해 달러를 모으기 시작한 ‘돈주’들의 자금을 끌어들일 방법을 모색한다. 평양의 아파트를 둘러싸고 거간꾼 혹은 브로커가 등장한 출발점이다.

‘살림집 데꼬.’ 아파트 분양을 담당하는 브로커를 일컫는 평양 말이다. 각 기관이 일단 2~3층까지 건물을 올리면 이들 데꼬가 나서서 수요자를 모집한다. 완공 후 해당 기관 직원 명의로 나올 입사증을 이전해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끌어다 쓰는 구조다. 이렇게 시장에 처음 나온 입사증은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거래되며 ‘프리미엄’이 붙는다. 거래 수단은 달러 현찰뿐이다. 북한 원화는 물론 중국 위안도 잘 쓰이지 않는다. 숨어 있는 달러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뜻이다.

돈을 끌어모은 기관은 각 지역 기업소와 중국으로부터 자재를 사들인다. 건설을 실제로 담당하는 인력은 평양 인민보안부 내무군 8총국. 병력 규모 4만~5만으로 원래 도시 인프라 건설을 담당하던 이 공병부대는 2000년대 이후 이런 식으로 아파트 건설인력의 공급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 5월 평천구역 아파트 붕괴 사고 당시 최부일 인민보안부장이 공개사과에 나선 이유다. 자재 수입과 인력 동원의 각 단계마다 그 우선순위와 규모를 둘러싸고 다양한 뇌물이 오간다는 것은 불문가지. 그 진행을 담당하는 전문 브로커 집단에게 주는 수수료도 만만치 않다.

아파트가 완공되면 명의를 가진 기관이 40~50%를, 인허가 기관이 10~20%를 가져간다. 평양에 새로 지은 아파트 가운데 40%가량이 선분양 형태로 민간에 팔려나갔다는 뜻이다. 북한의 아파트는 내장 작업 없이 골조와 창호로 이뤄진 기초형태로 공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덕에 화장실 타일부터 주방기구까지 중국으로부터 각종 인테리어 자재와 제품을 수입하는 비즈니스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입사증을 산 최종 구매자 앞으로 명의를 변경하는 데 드는 비용이 대략 1000달러. 도시경영사업소 직원들의 개인 비리라기보다 사업소 전체의 ‘비공식 수익 사업’으로 제도화한 지 오래다.

이렇듯 평양의 아파트에는 계획부터 입주까지 모든 단계에서 뇌물과 거간이 오간다. 당초에는 장마당 등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아파트를 사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는 아파트 관련 사업으로 부(富)를 축적하는 계층도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예 개인이 나서 아파트를 지으면서 각 기관의 명의를 빌리기만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는 게 최근 탈북자들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건설자본의 형성’이다.

‘자본가 중산층 계급’ 형성


2008년 이후 평양에 지어진 10만 호 가운데 40%가 10만 달러의 가격으로 민간에 팔렸다면 단순 액으로 환산해도 우리 돈 4조 원 규모다. 최대치라고는 하지만 그에 육박하는 달러가 평양 상공을 떠도는 부동자금이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이 정도 돈을 낼 수 있는 평양 시민의 수가 4만 명, 4인 가족 기준으로 10만 명 이상의 ‘자본가 중산층 계급’이 형성됐다는 방증일 수 있다.

북한 지도층으로서는 이러한 현상이 반가울 리 없다. 시장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거품과 뇌물 시스템의 반(半)공식화, 갈수록 늘어나는 건설비리와 붕괴 사고, 정책당국의 통제력 상실 등 부정적인 측면은 차고 넘친다. 이 때문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직접 나서 ‘입사증 비법(非法)거래 금지’를 선언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고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지난해부터는 건설을 맡은 기관이 직접 비공식 구매자를 모집하는 등 사실상 양성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소문도 들린다. 빠르게 번지는 시장경제의 아찔한 속도를 북한의 지배권력으로서는 감당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본래 평양의 아파트는 권력의 하사품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그가 가진 권력과 지위를 보여줬다. 이제 평양의 아파트는 돈이 지배한다. 그가 사는 곳은 그가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중국 대기업 지배주주 가운데 상당수는 1970~80년대 중국 개혁·개방 초기에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검은돈으로 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오늘 평양의 아파트로 돈을 벌어들인 누군가가 훗날 중국 알리바바그룹의 마윈이 돼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케 만드는 자본의 마술이다. 평양의 아파트 틈새로 보이는 ‘자본주의 북한’의 미래다.
▼ 북한 아파트 건설에 남한 건설사가 참여한다면 ▼
- 턴키방식으로 신도시 건설…대금 회수가 가장 큰 난제

10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2차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10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2차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최근 북한과 관련해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는 건설업계다. 더는 커질 리 없는 한국 건설시장 규모를 생각하면 유일한 돌파구는 북한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여기에 10월 중순 박근혜 대통령과 통일준비위원회가 “북한 민생 인프라 사업 차원에서 10년간 주택 100만 호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 기름을 부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이미 많은 업체가 베트남 등에 턴키방식(건설업체가 설계와 시공을 일괄 수행하는 방식)으로 신도시를 지어주는 ‘건설수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해왔다. 고스란히 북한에 적용한다면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평양 인근에 신도시 형태의 대규모 단지를 짓거나, 아예 평양 전체의 도시 리모델링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북한 당국으로서도 “메리트가 있다”고 북한 전문가들은 말한다. 남한에서 비료 등 현물을 지원받는 것에 비해 덜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남측 건설사가 참여해 짓는대도 이를 분배하는 일은 중앙당 등 북한 측 몫이므로, ‘지도자의 은혜’로 충분히 생색낼 수 있다는 것. 달라진 도시 경관은 그대로 김정은의 치적으로 남는다. 특히 부동산시장 확대로 골치를 썩고 있는 북측 정책결정자들로서는 비리 구조를 줄이고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이라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대기업 경제연구소 전문가는 “오히려 문제는 남측”이라고 잘라 말한다. 현금이 부족한 북한 경제의 특성상 가장 유력한 사업모델은 희토류 등 북측 광산에 대한 일부 사업권으로 건설대금을 갈음하는 방식일 텐데, 그에 얽힌 사업 리스크가 워낙 크다는 것. 건설 자금은 당장 지급해야 하지만 광물 판매 대금은 회수 기간이 매우 길어 민간기업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 대북사업 자체의 위험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관련해 앞서의 건설사 관계자는 “1조 원 넘게 쌓인 남북협력기금 등으로 우리 정부가 선지급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마디로 건설업계에서 염두에 두는 ‘사업 고객’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 정부인 셈. 이 경우 가장 큰 난제는 ‘남한 주민의 세금으로 평양에 아파트를 지어주는’ 방식의 사업으로 과연 국내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는 부분이다. 앞서의 경제연구소 전문가는 “보수층 여론을 강하게 의식해온 박근혜 정부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라고 촌평했다.

*참고자료 : ‘북한의 아파트 건설시장과 도시정치’(홍민), ‘북한 주민의 주택 이용관계와 민법상의 임대차계약’(장병일), ‘Meet Mr. X : One of the North’s new capitalist class’(안드레이 란코프), ‘북한 주택시장의 현황과 전망’(동용승), ‘북한 주택시장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연구’(홍성원)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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