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8월, 나는 천마산 스키장을 빌려 1박2일 코스로 지구당원 하계 연수행사를 열고 있었다.
갑자기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찌나 급하게 전화를 받으라고 독촉했는지 내 수행비서가 쪽지를 전하면서 ‘회의도중이라도 받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조용히 회의장을 빠져나가 전화를 받았다.
“이 의원이오? 나 좀 급히 만나야겠소. 지금 거기가 어디요?”
“천마산입니다. 지금 당원 단합대회를 하고 있는데 당장 자리를 뜨기 어려우니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뵙지요.”
“안되겠소. 각하(어찌나 세게 발음하는지 내겐 ‘깍가’로 들렸다) 지시를 받은 상황이니 지금 곧 만나야겠소. 내가 그리로 가겠소.”
약 1시간 후 노 위원장이 당도했다.
“아침에 각하를 뵈었는데 내년 초 서울에서 출마하라고 하더군. 그분 말씀이 지도자가 되려면 선거를 통해 부상해야 하는데 서울에서 승리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서울에서요?”
“그렇소, 서울에서 출마하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고향 대구에서 출마하면 몰라도 서울은 제가 생소합니다. 기반도 없고요’라고 말씀드린 뒤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달라고 청을 드렸지요. 그런데 각하 말씀이 전시(戰時)에 대구를 떠나 내내 서울에서 살지 않았느냐. 서울은 팔도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이니 특별히 고향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종찬을 봐라, 종로에 출마하여 기반을 잡고 정치인으로 크게 부상하지 않았느냐, 이종찬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하셔서 내가 급히 왔소.”
“그러면 지역을 어디로 결정하셨나요?” 나는 혹시 종로를 내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야 내가 살고 있는 연희동이지. 윤길중 의원을 물러나게 하고 서대문구에서 출마하라는데 내가 거기 살지만 동네사람들과는 교류가 전혀 없지 않소? 기껏 그 동네 헬스장에 나가 운동하는 것밖에 없는데….”
황당한 일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민심의 소재를 몰라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얼마 전 육사 후배인 허청일 의원(전국구)이 동작구에서 출마한다며 조기축구회에 나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역구 의원인 조종호 의원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이었다. 지난 선거 때 그분을 화합차원에서 영입해서 공천을 주었는데, 이제 물러나게 할 모양이었다.
노태우라는 분은 이미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만약 그를 공천한다면 서울 선거의 대세는 서대문구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순간 노 위원장의 서울 출마는 당을 위해서나, 그의 개인적인 장래를 위해서나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즉각 “선배님, 무리입니다. 대구에서 출마하시면 무난하겠지만 서울 선거는 ‘전투’입니다. 지금까지 쌓아 오신 명성에 흠이 갈 수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즉각 나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전투를 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네.” 그는 비겁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제 생각엔 재고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각하께서 하명한 사항이니 내가 정면으로 말하기가 곤란하지 않소? 그러니 이 의원이 수고를 해줘야겠소. 빠른 시일 내에 청와대에 가서 각하께 자세히 진언을 좀 해주시오.”
간곡한 요청에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면서도 전두환, 노태우 두 분 간에 벌어진 일에 내가 어떻게 끼어드나 하는 걱정도 생겼다.
그 후 나는 생각 끝에 우선 청와대 정순덕 정무수석을 만났다. 그는 나의 육사 동기생으로 무슨 말도 나눌 만한 사이였다.
“노태우 선배 서울 출마 얘긴 알고 있겠지?”
그는 깜짝 놀라면서 어디서 들었느냐고 반문했다.
“아냐, 노 선배가 나를 찾아왔어. 그래서 내가 노 선배 같은 거물이 서울에 출마하면 선거가 아니라 전투가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네. 그랬더니 나보고 각하께 그런 사정을 설명하고 재고토록 진언해달라고 하네. 어떻게 하면 좋겠나?” 나는 속으로 정 수석에게 공을 넘기고 싶었다.
그러나 정 수석은 “너는 나서지 마라. 이미 확정적이다”라고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권익현 대표에게도 보고했다. “노 선배를 굳이 서울에 출마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칫 잘못되면 당 전체에 부담이 될 텐데요.”
권 대표는 나를 응시하면서 역시 번복 불가능한 일임을 강조했다. “각하께서 다 생각이 있어서 한 결정이니 당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소.”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청와대와 당에선 노 위원장의 서울 출마를 중심으로 공천계획의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국 국가원수의 영접 행사 참석차 김포공항에 나갔다가 노 위원장 내외를 만났다. 그는 행사가 끝나면 연희동 집으로 잠깐 와달라고 했다.
“어떻게 말씀드려봤나? 잘 안 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이 의원에게 모든 것이 달렸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못해요.” 부인 김옥숙 여사가 더 몸이 달아있었다. ▼ 7년만에 이뤄진 ‘오래된 약속’ ▼
후계자 노태우, 대통령 후보 지명
“그분 심중에서 동지 노태우가 후계자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그 구체적 시간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들은 순수한 영혼과 정열이 세파에 물들지 않았던 청년기에 만났다. 우정은 수십 년간 계속됐다. 운명적인 몇몇 사건들이 그들의 관계를 친구에서 동지로 승화시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씨가 남긴 미완(未完)의 회고록엔 이런 구절이 있다. 동아일보는 1996년 12월 그녀의 회고록 초고를 입수해 특종 보도했지만, 회고록은 결국 출간되지 못했다.
그녀는 전 대통령이 ‘동지 노태우’를 언제부터 후계자로 생각했는지 최초의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제5공화국의 출발점이 바로 평화적 정권교체와 단임에 있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일찍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기억하는 유학성 전 의원의 말도 무척 흥미롭다.
“이런 결과가 실현되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오래된 약속’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 것이지요.”
1987년 6월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직후 유학성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학성은 1979년 12·12 당일 경복궁 30경비단장실에 모인 신군부 핵심 중 한 명.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중장)로, 정확히 말하면 신군부의 선배였다. 그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중장)이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놈들은 모두 반란군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직접 장 사령관과 통화하며 설득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유학성이 얘기한 ‘오래된 약속’이란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사실 12·12 그날의 상황을 되돌아보면 약속이란 표현 자체가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12월 12일 모여서 ‘정승화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문제’를 처리하자고 말한 사람도 노태우 당시 9사단장이었고, 일촉즉발의 순간에 휘하의 29연대 병력을 중앙청으로 출동시킨 사람도 노태우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정승화 총장 연행 문제에 관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청와대에 가 있었다. 30경비단장실에서 노태우는, 전두환의 대리인이었다.
이듬해 7월,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상임위원장이 5공 헌법 초안을 다듬고 있던 우병규, 박철언 법사위원을 불러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 돼야 한다. 숫자는 럭키 세븐이다”라고 했을 때 박철언이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던 이유도 유학성이 말한 ‘오래된 약속’과 무관치 않다.
“대통령의 임기는 자연스럽게 6년으로 하되, 단임제 장치를 설치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도 나에게 임기는 6년이라고 귀띔해줬다. 그런데 전 위원장이 ‘6보다는 7이 낫지 않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나는 속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내가 앞장서기에는 너무 민감한 문제였다.”(박철언 저,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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