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탈영병, 中서 살인극]20가구 접경마을 날벼락… “불안해 못살겠다” 주민들 떠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5일 03시 00분


사건 일어난 허룽 난핑촌 가보니

영하 15도가 넘는 데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던 지난해 12월 31일 오전 8시. 지린(吉林) 성 옌지(延吉)에서 차를 한 대 구해 북한 병사가 조선족 4명을 살해한 사건 현장이 있는 두만강변의 허룽(和龍) 시 난핑(南坪) 촌을 향해 출발했다. 강의 중국 쪽 강변에 설치된 2m 높이의 철조망을 따라 남쪽으로 2시간쯤 달리는 동안 중국이 설치한 감시 카메라와 강 건너 북한 경비 초소가 보였다.

10분쯤 지나자 난핑 촌이 멀리 눈에 들어왔다. 강만 건너면 바로 북한 무산군 칠성리로 갈 수 있는 곳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 북-중 통행이 자유로웠던 난핑 촌은 요즘 북한 양강도 혜산시, 함경북도 회령시와 함께 3대 탈북 루트로 통한다.

칠성리 일대에서 3년 이상 장기 복무한 변경의 북한 군인들은 난핑 촌 마을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행한 중국인들은 “이 마을에는 10여 년 전부터 북한 군인이 밤에 넘어와 밥을 얻어먹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귀띔했다. 심지어 소와 돼지 등을 훔쳐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서 검문을 당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200m가량 떨어진 양로원 마당에 차량 서너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차량이라고 했다. 기자가 중국 출신이 아닌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자칫 취재를 하다 억류될 우려도 있어 일단 동행한 중국인에게 부탁해 양로원에 들어가 ‘사건 현장’인 민가에 가 볼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양로원에 갔다가 돌아온 중국인은 “이미 양로원 안에서 마을 주민 20여 명을 모아 놓고 군경 합동조사반이 한 명씩 조사 중이었다”며 “군경은 현재 양로원 창문을 통해 마을 진입로를 감시하고 있다. 평소 20여 가구가 평화롭게 살던 곳이었는데 초비상이 걸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중국인들과 함께 취재한 이번 사건의 경위를 종합하면 이렇다. 권총을 갖고 탈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군 병사가 처음 이 마을 차모 씨 집에 들어간 시간은 지난해 12월 27일 오후 7시 반경이다. 그가 마을에 머문 시간은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추정됐다.

범인은 차 씨를 권총으로 위협해 100위안을 빼앗고 “꼼짝 말고 엎드려 있으라”고 말한 뒤 집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범인이 민가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는 “허기를 달래고 탈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들이 나왔다. 범인이 두 번째로 한족 주민의 집에 그냥 들어갔다 나온 것은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현지 취재에 따르면 사건 현장은 무장한 공안과 경찰이 밤새도록 지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상당수 마을 주민이 “불안해서 못살겠다”며 떠났을 정도로 이번 사건은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었다. 범인에게 돈을 준 차 씨도 정신적인 충격이 심해 다른 곳으로 옮겨져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입구를 잠시 둘러본 뒤 서둘러 차를 몰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범인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과 경찰에 쫓기며 도주한 길이다. 범인이 배에 총을 맞고 잡힌 푸둥거우(釜洞溝) 촌 계곡은 북한 최대의 노천 탄광이 있는 무산 시 시가지 건너편에 있다. 사건 현장으로부터 7km가량 떨어진 곳이다. 붙잡힌 시간은 밤 12시 안팎으로 도주 시간은 4시간가량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검거 지역까지 이동하면서 변경 도로를 오가는 1시간 동안 중국군 순찰 차량을 3차례나 만날 정도로 경비가 심했다. 범인이 현재 입원해 있는 허룽 시 병원 마당에는 일반인은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경찰 차량이 2, 3대 주차되어 있었다. 한 중국인 소식통은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북한 쪽에서 병사를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누가 총상 환자인지를 모르게 치료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같은 병원 영안실에는 피해자 4명의 시신도 안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범인이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탈북 및 사건 경위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범인이 사용한 권총은 북한 내에서는 장교에게만 지급되는 것이다. 이를 놓고 추정해 볼 때 부대 내 장교의 권총을 훔쳐 나왔을 가능성이 크고, 이렇게 되면 무장 탈영일 가능성도 크다. 그가 도주로를 북한 쪽이 아닌 두만강 상류 쪽 중국 땅으로 잡은 것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사건이 발생한 난핑 촌은 북한 병사들도 익숙한 곳이며 범인의 나이로 볼 때 9년간 북한군에서 복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살해한 동포 허모 씨 부부와 이모 씨 부부는 변경의 북한군과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있으며, 살해 동기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허룽=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북한 탈영병 중국인 살인#허룽 난핑촌#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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