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탈영병 中주민 살해 파문]탈북자에 밥 챙겨주던, 순박한 그들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7일 03시 00분


난핑촌 거쳐 탈북한 주성하 기자가 본 참극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북한군 탈영병이 중국으로 넘어가 주민 4명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진 허룽(和龍) 시 난핑(南坪) 촌은 기자가 2000년대 초반 탈북할 때 두만강을 건너 반나절가량 머물던 바로 그곳이다. 탈영병이 강을 건넌 지점도 기자가 강을 건넜던 바로 그 장소이다.

이번 사건 소식을 듣고 기자는 10여 년 전 목숨을 걸고 북한을 빠져나온 탈북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안내인의 재촉 속에 대낮에 무릎 깊이의 두만강을 전력 질주해 건너던 기억, 난핑 뒷산에 올라 북한 쪽을 바라보며 안도하는 한편으로, 과연 내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밤을 기다리던 순간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어둠이 깔리고 주위가 어두워진 뒤 기자는 난핑 마을로 내려와 미리 소개받은 집을 찾으려 돌아다녔지만 수십 채의 농가가 비슷비슷하고 문패마저 없어 찾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어느 민가에 들어가 “이러이러한 집을 찾고 있다”고 했더니 집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친절하게 알려줬다. 기자가 탈북자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조선족 마을이라 한국말로 통할 수 있었다.

기자가 마침내 소개받은 집을 찾아 들어가 “집을 가르쳐준 중년 여인이 나를 신고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더니 “숟가락까지 몇 개인지 서로들 알고 있는 뻔한 동네에서 그런 짓은 안할 테니 걱정 말라”는 답이 돌아와 안심했다. 음식을 푸짐하게 얻어먹고, 여비까지 얻어 밤길을 타고 다음 목적지인 허룽 시내로 가기 위해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타려 했지만 검문하는 군인들 때문에 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산길을 타고 걷다가 산에서 노숙을 하고 다음 날 저녁까지 걷고 또 걸었다. 너무 배고파 외딴 집으로 들어가 “탈북자이다. 먹을 것을 좀 줄 수 있느냐”고 하자 집주인인 한족 남자가 직접 된장찌개를 끓여 주었다. 그때만 해도 옌볜의 민심은 탈북자들에게 비교적 동정적이었다.

기자는 두만강을 다섯 번이나 건너고 탈북에 성공했다. 처음 강을 건넜을 때 허룽 시내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였던 공안은 조사를 마친 뒤 내게 “김일성대 졸업생이라고? 그러면 우리 베이징대 졸업생이나 마찬가지”라며 “인재가 북에 끌려가서 죽는 걸 바라지 않아 풀어주니 다시는 잡히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 북-중 국경의 민심은 기자가 탈북할 때와는 판이했다. 국경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됐고, 집집마다 비상신고 전화가 지급돼 있다. 이웃 주민들이 탈북자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일을 겪은, 그 인심 좋던 난핑 촌 주민들은 앞으로 탈북자를 보면 분노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넌 탈북자들 역시 살기 위해 더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북-중 국경의 이 같은 현실은 통일에 대한 장밋빛 꿈에 대한 경종일지도 모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탈영병 조선족 살해#중국#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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