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욕심에 노태우 서울 출마 막았다니… 말이 됩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0일 03시 00분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21〉노태우 서울출마令 <하>

1996년 8월 26일 ‘12·12 및 5·18 사건‘ 1심 선고공판정에 선 유학성, 노태우, 전두환(앞줄 왼쪽부터). 1987년
 6월 노태우 대표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된 직후 유학성은 “7년 전의 오래된 약속이 드디어 이뤄졌다”고 했다. ‘전두환 다음은
 노태우’라는 비밀 약속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사실일까? 동아일보DB
1996년 8월 26일 ‘12·12 및 5·18 사건‘ 1심 선고공판정에 선 유학성, 노태우, 전두환(앞줄 왼쪽부터). 1987년 6월 노태우 대표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된 직후 유학성은 “7년 전의 오래된 약속이 드디어 이뤄졌다”고 했다. ‘전두환 다음은 노태우’라는 비밀 약속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사실일까? 동아일보DB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부부로부터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다시 받은 지 며칠 후, 권익현 대표가 당무 보고차 청와대에 간다고 했다. 나는 국회운영관계 보고도 할 겸 같이 가겠다고 했다. 권 대표는 바로 눈치를 채고 “무리하지 마시오”라며 나를 말렸다. 말도 꺼내지 말라는 암시였다.

청와대 대기실에서 정순덕 정무수석도 거듭 나에게 귀띔했다. “며칠 전 각하께 다시 확인해 봤는데 확고하시더라. 말해봤자 안 먹힐 거야.”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권 대표의 보고는 간단했다. 그가 일어나자 전 대통령은 “돌아가면 즉각 사표를 받으시오. 이제 준비를 서둘러야 되지 않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윤길중, 조종호 두 분의 지구당 위원장 사표를 받으라는 지시인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권 대표는 일어서면서 나에게 윙크를 하고 나갔다. ‘잘해봐. 하지만 안 될 거야.’ 그런 뜻 같았다.

나는 깊이 숨을 내쉰 뒤 말을 꺼냈다. “각하! 한 가지 제가 개인적으로 보고드릴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언데? 말해봐.” 전 대통령은 몹시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서울 선거는 대단히 중요한 선거입니다. 그런데 서울 지역에 두 사람의 새 인물을 공천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두 훌륭한 분일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출마할 지역은 우리가 지난번 선거 때 야권에서 영입한 인사들로 당선된 지역입니다. 그분들에게 이제 물러나라 한다면 각하께서 1회용으로 야권인사를 써먹고 버린다는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한 분은 윤보선 대통령의 측근이요, 또 한 분은 혁신계의 지도급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하필이면 육사 나온 두 분, 그것도 모두 대구 경북고 사람들을 천거하셨습니다. 남들은 이를 두고 틀림없이 뭐라 할 것입니다. 결국 각하는 사람을 쓰고 버린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고, 또 그 후임은 모두 육사 출신으로 바꾼다는 오해를 받을 것 아닌가 심히 걱정됩니다. 선거 때면 없던 일도 모두 폭로하는 판인데 자칫 이번 공천을 두고 별별 공격 자료가 다 나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선거에 큰 이슈로 등장할 것 같습니다. 서울 선거가 어렵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단숨에 할말을 다해 버렸다. 그런데 전 대통령은 의외로 표정이 진지해지고 있었다.

“이종찬! 나는 거기까지 생각 못했는데 자네가 좋은 것 지적해 주었군.”

전 대통령은 솔직한 분이다. 그런 것까지 생각지 않고 결정했노라고 그 자리에서 이실직고한다는 것은 지도자로선 어려운 일이다. 이런 솔직함이 그분의 장점이다.

“자네 말 들으니 그럴 것 같군. 그러면 두 사람 다 물러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만약 한 사람만 공천하면 누가 좋을 것 같은가?”

“노태우 위원장을 공천하면 당을 대표하는 주자로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노태우 공천을 먼저 거론했다. 전 대통령이 노태우, 허청일 두 사람 가운데 택일한다면 허청일 쪽으로 기울 것이 확실했다. 왜냐하면 허청일 의원(전국구)은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이미 오래전에 동작구로 이사를 가서 많은 것을 투자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이 적중했다.

“아냐. 허청일은 오래전부터 준비했어. 자기 말로 당선에 자신이 있다 하더군. 노태우는 전국구로 돌리면 되지. 그러면 빨리 돌아가 권 대표에게 윤길중 의원의 사표는 보류하라고 하게.”

“네, 알겠습니다.”

나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왔다. 정순덕 수석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여간 자네 재주는 알아주어야 해! 어떻게 그런 논리를 전개해서 각하를 돌아서게 하나….”

권 대표도 반색했다. “잘됐다. 나도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정말 노태우나 당을 위해서 잘된 일이야.”

노태우 위원장이 그때 서대문에서 출마했다면 당시 새로 출범한 신민당 바람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아마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노태우 위원장은 그렇게 태풍을 피하게 되었고, 대통령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역으로 모략을 당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다. 어떤 야비한 자가 노 대통령에게 모함을 했다. “사실 이종찬이 각하의 서대문 출마를 기를 쓰고 막은 것은 자기가 서울의 영주노릇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 주고 뺨 맞은 격이다. 그럼에도 나는 주변 파리 떼의 모략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한참 후에 노 대통령 자신이 그런 모략에 솔깃하여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92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인 안교덕 선배(육사 11기)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1985년 2·12 총선거 때 노태우 대통령의 서울 출마를 막았소? 그게 당신이 오해를 받게 된 원인이오.”

“아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내가 막다니요?”

세상에 호의를 이렇게 왜곡해도 되는 것인가? 1992년 대선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후보를 밀었지만 결국 김영삼 대통령 때 감옥행을 면치 못했다. 호의를 악의로 받은 셈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가 보다.  
▼ “이종찬이 盧 비방” 靑 문건 진위는? ▼

이종찬의 기억, 노태우의 기억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 올림픽 준비에 모든 정력을 쏟고 있던 1985년 초, 전두환 대통령은 내게 12대 총선에 출마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12·12’ 이후의 시대상황은 군인으로 생애를 끝내고 싶어 했던 많은 이들을 다른 운명의 길로 몰아가고 있었다. 정치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나는 지역구를 맡을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권익현 대표는 ‘대통령의 뜻이니 받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고, 이종찬 의원은 ‘대구가 여의치 않다면 전국구로 나가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라며 ‘대통령을 뵐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말씀드리겠다’고 했다.”(노태우 회고록)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기억은 이렇다. 이종찬 의원의 결정적 도움으로 서울 출마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는 얘긴 없지만, 그래도 이 의원이 전 대통령과 노 위원장 사이에서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도록 기록해 놓았다. ‘기껏 도와줬더니 마치 내가 딴 속셈을 품고 자기의 서울 출마를 막은 것처럼 뒷담화를 흘리더라’는 이종찬의 기억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물론 2011년 8월 출간된 ‘노태우 회고록’의 대부분은 그가 비자금 사건으로 옥중에 있을 때 메모한 내용들이다. 다시 말해, 전두환의 서울 출마령(令)과 이종찬에 관한 기억을 ‘재정리’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여하튼 노태우와 이종찬 사이에는 이런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987년 6월 2일 청와대 상춘재. “나는 오늘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려고 이 자리에 중집위원 여러분을 초대하였습니다.” 전 대통령은 곧바로 노태우 대표를 차기 후보로 지명한 다음 술잔을 들었다.

모두들 무릎을 꿇고 전 대통령 앞으로 나아가 잔에 술을 부었고, 전 대통령은 약간 받아 마시는 시늉을 낸 다음 옆에 쌓여 있는 새 잔에 술을 채워 돌려줬다. 이종찬의 차례가 왔다. 술을 권하는 순간, 전 대통령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이종찬, 내가 누군지 알지. 잘해야 돼! 노태우 후보를 잘 받들어야 해! 알지?”

이종찬의 기억. “전 대통령이 나를 향해 그런 술주정 비슷한 말을 늘어놓자 참석자 모두가 긴장했다. 그 순간, 얼마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에서 나에 대해 모략을 한 사실이 이제 현실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이종찬은 노태우 대표에 대하여 불만을 포지하였다. 노태우가 우유부단하고,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만큼의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언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유언비어가 일단 무책임하게 청와대 파일에 담기면 좀처럼 해명하거나 부인할 기회가 없다. 그게 바로 정보정치의 폐해다.”

이종찬은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께서 하신 말씀의 뜻, 잘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알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전 대통령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허허 허허, 그래, 그래 알았어. 자네가 앞장서야 해, 허허….”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노태우#서울#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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