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5월 23일 함운경을 비롯한 삼민투 학생 73명이 서울 한복판의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학살을 지원한 미국의 공개사과와 전두환 정권 지원 중단’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정부는 극도로 흥분했다.
그 직후 노신영 국무총리가 국회대책도 논의할 겸 만나자고 해서 총리실을 방문했다. 손님이 있는 듯해 기다리고 있는데 노 총리가 들어오라고 했다. 김석휘 법무부장관이 앉아 있었다.
“마침 잘됐습니다. 미문화원 점거사건 주동자들에 대해서 위에서는 모두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하라고 하는데 여기 김 장관은 과한 조치라 하여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총무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제야 김 장관이 총리와 장시간 숙의를 거듭한 이유를 알게 됐다.
“저는 검찰업무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통념상 국가보안법은 간첩 다루는 법인데 이것을 학생운동 처벌하는데 적용하는 건 김 장관의 의견대로 과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국가보안법이란 큰 칼 아닙니까? 그 칼이 칼집에 들어있어야 국민들에게 어떤 법적인 위엄을 갖추는데 막상 칼을 빼서 학생들을 향하여 휘두르면 가벼워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일반 시민의 한 사람으로 의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앞에 앉은 김 장관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청와대는 강경했다. 김 장관은 불과 5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청와대와 안기부에서 모종의 작업을 한다는 정보를 일찍부터 듣고 있었다. 83년 12월초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할 무렵이었다. 당시 노신영 안기부장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제적된 학생이 1200여 명이고, 교도소에 들어간 학생만 해도 350명에 가깝습니다. 이들을 관리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더욱이 명년(84년) 5월이면 교황이 한국을 방문합니다. 그분은 폴란드 분으로 자유화에 대한 의지가 어떤 교황보다 강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으면 우리 정부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탕평책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 연말을 기해서 일제히 털어버리고, 새로 ‘정화 탱크’를 하나 만들어 학생들을 선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직후 대대적인 사면과 가석방조치가 있었다. 그렇지만 ‘정화 탱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 나에게는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노 총리를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원안정법’이라는 이름의 법안 시안이 내손에 들어왔다. 학생 약 5000명을 수용해 순화한다는 안이었다. 허문도 청와대 정무수석은 일본에서도 1969년 ‘대학의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 형태로 법을 만든 적이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비상시도 아니고 평상시에 강제수용소가 가능하겠는가?
1차 당정협의가 있었다. 당에서는 이한동 사무총장과 내가 참여했고, 정부에서는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 수석이 나왔다. 그날은 정부 측의 일방적인 설명만 들었고 이 법이 자칫 정치범수용소나 삼청교육대 같은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대화만 오갔다.
그러나 회의가 끝난 뒤 현홍주 당 정책조정실장이 ‘이 법은 문제가 많다. 자칫 위헌 소지도 있다’고 귀띔해줬다.
7월 26일 장 부장과 허 수석이 재차 연락을 해왔다. 이한동 총장과 나, 그리고 이번에는 현홍주 실장까지 함께 만났다. 정부 측은 몹시 서두르는 태도였다. 문제학생들을 수용할 시설이나 교육내용은 준비가 끝나 있었다. 입법만 되면 즉시 행동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법을 계속 의원입법으로 해 달라는 게 나의 비위를 거슬렀다.
나는 이런 보안처분에 관한 법을 어떻게 의원입법으로 할 수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마약법, 사회안전법이나 소년법과 같이 보안처분에 관한 법률은 모두 정부입법이었다”고 반론을 폈다.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그런데 누군가가 절충안을 냈다.
“학원소요의 대상자를 선정할 때 판사가 결정한다면 나는 이 법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발끈했다.
“아니, 나 같은 법의 문외한도 그 말에 납득할 수 없어요. 판사가 결정하는 것은 검사의 공소장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지 아무런 사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사안을 판단하도록 하는 것은 월권입니다.”
나는 자리를 뜨고 말았다. 이게 괘씸죄를 부른 것 같다.
7월 30일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온 기자들의 질문은 온통 8월 임시국회 소집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시급한 민생법안을 처리하는 국회라면 소집해야겠지만 학원안정법은 아직도 소집할 계획이 없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게 또 괘씸하게 들린 것 같았다.
그날 마침 미 대사관의 클리브랜드 부대사와 오찬을 하는데, 그가 불쑥 “수용소(gulag) 계획은 잘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비꼬는 투였다. 창피했다.
다음 날 노태우 대표로부터 호출이 왔다.
“청남대에서 각하가 급히 찾는다고 해 헬기로 갔다 왔소. 이 총무를 경질하라는 거요. 나도 학원안정법에 이의가 있지만 각하가 너무 강경하기 때문에 말없이 돌아왔소. 그동안 심려가 많았을 터이니 좀 쉬면서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합시다.” ▼ “허문도? 그는 조연에 불과했다” ▼
박철언이 기록한 ‘학원안정법’
1985년 7월 15일 미 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으나 피고들과 방청객들이 반미 구호를 외치고 운동권 노래를 부르며 재판을 거부하는, 전두환 정권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전 대통령은 즉각 김석휘 법무장관을 경질할 정도로 격노했다. 이때,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 출신의 강경파인 허문도 정무1수석이 학원안정법 아이디어를 내고 밀어붙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었던 이한동 전 국무총리도 전기 작가 김석록 씨가 쓴 ‘가슴이 넓은 남자가 좋다’(1997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이종찬 원내총무, 현홍주 정책실장, 그리고 안기부에서조차 반대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유독 허문도 수석만이 강력하게 밀다가….”
그런데 그즈음 장세동 안기부장 특보로 근무했던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증언은 좀 다르다.
“실상 허문도 수석은 조역에 불과했고, 파동의 중심에는 전 대통령과 장 부장이 있었다.”
박철언은 2005년 출간한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미 문화원이 점거당한 다음날 안기부 간부회의에서 장 부장은 “주요 보안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에는 총살을 해서라도 저지해야 한다”며 흥분했다(미 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이 터진 건 장세동이 경호실장에서 안기부장으로 옮긴 지 석 달밖에 안됐을 때였다). 그리고 6월 5일 농성학생들의 배후세력인 삼민투위와 전학련에 대한 전면수사 방침을 결정하면서 필요하다면 8월 15일경 임시국회를 열어 ‘학원정상화 임시조치법안’을 단독 통과시키겠다는 것이 장 부장의 결심이었고, 안기부에서 법안 시안을 준비하던 6월 말까지만 해도 정부와 민정당은 물론 청와대 수석들도 진행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7월 5일엔 임시조치법안에 대한 대통령의 추가 지시가 내려왔는데, 첫째 교육 중 단식·탈출·집단행동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고, 둘째 내무반별로 10∼20명을 수용하여 훈련시키고, 셋째 오지의 감호소를 활용하라는 것 등이었다 한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4년 6개월간 청와대 비서관으로 신임을 받았던 박철언은 전 대통령의 지시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장 부장으로부터 ‘대통령의 추가 지시’를 전해 듣는 순간, ‘아, 이건 정말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내린 지시구나!’라는 직감을 받은 것 같다. 박철언은 그래서 학원안정법 파동은 ‘전두환과 장세동의 작품’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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