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석에서 만난 군 고위당국자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방치하다시피 한 지난 20여 년을 이렇게 규정했다. 북한의 핵무기 소형화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내용의 ‘2014 국방백서’가 발간된 직후였다. 그는 북한이 2, 3년 내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해 서울을 조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도 시간문제라고 예견했다. 핵미사일로 무장한 잠수함은 ‘최종 핵병기’로 불린다. 수중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잠수함의 핵공격은 사전 탐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구축 중인 킬 체인(Kill Chain·북한의 핵과 미사일 기지를 탐지, 추적, 타격하는 시스템)도 무용지물이다. 한국형미사일방어(KAMD) 체계로도 완벽한 요격을 장담할 수 없다. 북한의 핵위협이 ‘임계점’을 넘었지만 대책과 전략이 부재한 현 안보 상황이 안타깝다고 그는 토로했다.
이런 사태까지 온 데는 북핵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금쪽같은 대응시간을 허비한 탓이 크다. 실제로 북한이 1990년대 초부터 ‘살라미 전술’과 속빈 협상으로 시간을 끌며 핵개발에 전력투구하는 동안 한국은 무사안일주의로 일관했다.
북핵은 대미 협상수단일 뿐 같은 민족을 겨눈 게 아니라는 맹신이 주술처럼 번졌고 ‘핵은 자위용’이라는 북측 주장을 두둔하는 국가지도자까지 있었다. 그뿐인가. 주변 4강의 외교적 해결에 기댄 채 ‘컨틴전시 플랜(비상대책)’도 세우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북핵위기를 수수방관한 정부와 군의 책임도 크다.
북핵에 대한 오판은 안보 실정(失政)으로 이어졌다. 북한이 사거리와 정확도를 개량한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고, 핵실험까지 했지만 한국은 초보적 방어수단도 강구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 대북요격체계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는 경고가 쏟아졌지만 정부와 군은 미적거렸다.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 편입 논란과 주변국 자극을 이유로 탄도탄을 요격할 수 없는 중고 미사일을 도입한 게 전부다. 북핵 위협은 가중되는데 한국의 안보는 현상 유지는커녕 스스로 빗장을 허무는 우를 범한 셈이다.
북핵 안보의 ‘역주행’은 국방예산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199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전까지 연평균 10% 이상을 유지하던 국방예산 증가율은 2000년대 후반 8%대로 주춤한 뒤 2012년부터는 5% 아래로 떨어졌다.
최근 5년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예산 비율은 2.6%로 세계 22개 주요 분쟁대치국 중 최하위권이다. 복지와 민생 예산에 밀려 정부 재정의 국방예산 비율은 갈수록 줄고 있다. 최근 3년간 신규 무기 도입을 위한 방위력 개선비의 증가율은 2%대에 불과하다.
이로 인한 국방중기계획의 전력증강 예산 차질액은 3조4000억 원에 달한다. 이래서는 북핵 대비의 필수 전력을 적기에 확보하기란 요원하다. 병력 감축과 첨단무기 도입을 통한 정예강군 육성도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유사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낼 국방력 건설은 국가의 존재 이유이자 핵심 책무다. 피의 숙청과 광기로 얼룩진 30대 초반의 독재자가 핵 공격을 협박하는 초유의 안보위기를 헤쳐가기 위한 국방투자를 외면해선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군도 구태의연한 전력증강 정책의 혁파 등 대변신을 해야 한다. 북한의 비대칭위협은 날로 고조되는데 언제까지 ‘자군 이기주의’에 빠져 나눠 먹기식 전력증강 정책을 고수할 건가. 이런 식으론 국방예산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예산의 선택과 집중적 투자를 통해 합동성을 극대화함으로써 북핵 위협을 무력화할 전략과 방도를 찾는 데 군 수뇌부는 직을 걸어야 한다. ‘안보 골든타임’을 더이상 허비해선 안 된다. 이 시기를 놓칠 경우 몇 년 뒤 발간될 국방백서는 이렇게 기술할지도 모른다. “북한은 마침내 소형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독자적인 방어수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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