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 당선자의 연희동 사저는 내방객으로 붐볐다. 잔치판이 벌어졌지만 노 당선자의 최측근 외에는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당에서는 육사 11기 동기생이며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수고한 권익현 고문 한 사람만 ‘사저 잔치’에 낄 수 있었다.
당 쪽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노 당선자가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연희동 잔치에 참석했던 권 고문의 말을 들어보려고 다음날 아침에 그의 아현동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권 고문의 얼굴이 아주 어두웠다. 잠시 후 그는 나를 안방으로 이끌더니 이런 말을 했다.
“당의 앞날이 심히 걱정되오.”
나는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어제 노 당선자 집에서 모임이 있었소. 그 자리에서 김옥숙 여사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려서 그럽니다. 김 여사 말이 ‘이번 대선에서 민정당이 한 일이 무어 있나요?’라는 거였소. 그러고는 이어서 ‘사실 선거는 월계수회와 태림회가 다 한 것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거요. 나는 충격을 받았소. 민정당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고생을 했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말이오. 나는 그 집 풍속을 잘 알아요. 김 여사의 말은 노 당선자의 말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권 고문은 그 말을 맺고는 담배를 꺼내어 물고 한숨을 쉬었다.
“당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거요.”
그 말은 적중했다. 그날부터 민정당은 수난의 길에 들어섰다.
월계수회란 무엇인가?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인 박철언의 사조직을 말한다. 역대 선거판을 보면 으레 이런 부류의 사조직이 공조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마치 선거의 일등공신인 것처럼 떠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또 태림회는 노 후보의 아우인 노재우가 만든 사조직이다. 그러나 노재우는 형수에게 잘못 보였는지 대통령 선거후 조직은 즉시 해체되고 말았다.
하여튼 이런 사조직이 공조직인 민정당을 제압한 것은 정치적으로 큰 손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의 심중에 민정당은 ‘전두환의 사당(私黨)’이었다.
노 후보가 민정당과의 분리전략을 노골화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대선운동본부에 이런 말을 전해 온 바도 있었다. “노 후보에게 전해주시오! 필요하다면 나를 밟고라도 넘어가라고 말이오.”
노 후보의 측근 참모에는 두 그룹이 있었다. 하나는 현홍주 민정당 사무차장, 이병기 당 총재 비서실장, 김종휘 국방대학원 안보문제연구소장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교적 정상적이고, 균형 잡힌 감각을 갖고 있으며 상식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또 한편에는 최병렬 의원이나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처럼 정치공학에 능한 사람들이 있었다.
민정당과의 단절론을 내세운 핵심인사는 아무래도 박철언과 최병렬 두 사람을 꼽아야 할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좌(左) 병렬, 우(右) 철언’이라 불렀다.
이런 노 후보의 5공 단절 속마음도 모르고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날 때까지 헛물을 켜고 있었다. 김윤환 청와대비서실장은 마지막 작업으로 ‘국가원로자문회의법’과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을 입법하고자 서둘렀다. 이를 안 노태우 당선자는 매우 불쾌해했다. 그는 즉각 이대순 원내총무를 불렀다.
“지금 추진 중인 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은 것이 노 당선자의 특징이다.
“대통령 업무를 추진해 나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총무는 눈치도 없이 그만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래요?”
당선자의 표정을 읽은 이 총무는 재빨리 그가 한 말을 거둬들여야만 했다.
“여하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노 당선자의 취임 후엔 청와대의 측근으로부터 여러 형태로 압력이 내려왔고, 법안은 결국 제출도 되기 전에 사산(死産)하고 말았다. 뜨는 해의 승리였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취임식이 있기 일주일 전 청와대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전면 대수술방안을 구상하고 있음을 언론에 흘렸다.
나는 “올 게 왔구나!”하고 직감했다. 사태가 이런데도 며칠 전엔 전경환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명예회장이 나를 찾아와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동안 형님이 청와대 계시니깐 정치를 하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점퍼만 입고 새마을운동만 열심히 하면서 참고 기다렸는데 이제 태우 형님이 당선되었으니 나도 국회에 진출하여 그분을 도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요, 어디서 나갈 생각입니까? 합천입니까? 출마하려면 먼저 형님과 의논해야지요…. 의논하셨어요?”
“아직 안했습니다만 우선 선배님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왔습니다.”
“지금이 적절한 시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형님께 허락을 받는 게 중요한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노 당선자께서 아직 무엇이라 지침을 준 것이 없지만 그분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경환은 노 후보의 당선으로 자기가 할 일이 더 많아졌다고 착각하는 눈치였다. ▼ ‘전경환 월권’ 전두환에 전한 박철언… “풍설에 현혹되지 말라” 질책 받아 ▼
친인척 vs 친인척
‘전경환 문제’는 100% 전두환 대통령이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85년 초쯤이었을까. 박철언 비서관은 전 대통령을 독대하는 기회에 ‘전경환 문제’를 꺼냈다. 전 대통령은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 직후 이른바 ‘쓰리 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중 허화평, 허삼수 두 수석비서관을 내치면서 박 비서관을 수석회의 고정멤버로 참여시켰다.
“자제와 시정이 필요합니다.”
박 비서관은 전경환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에 대해 몇 가지 구체적인 보고를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전경환의 새마을운동본부에는 이미 정·재계 인사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었고, 서울 화곡동 본부가 ‘소(小) 청와대’라는 풍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그런데 전 대통령은 벌컥 화부터 냈다. “뭐야! 경환이가 그런다고? 당장 확인해보자.” 그러고는 부속실에 전경환 수배를 지시했다. 20분 만에 전경환이 달려왔다. 집이 청와대 턱밑에 있는 팔판동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늘 청와대 주변을 맴돌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 ‘총알같이’ 달려왔다.
박철언은 졸지에 대통령 앞에서 전경환과 대질심문을 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전 대통령은 “네가 이권에 개입하고 주변에 잡음이 많다고 여기 박 비서관이 보고하는데 어떻게 된 거냐?”라고 추궁했다.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2005년)에 남긴 박철언의 기억. “나는 참으로 난처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전경환 회장은 그런 일이 절대 없다고 모두 부인하며 나를 노려봤다.”
전경환이 부인하자 전 대통령은 도리어 박 비서관을 질책했다.
“전경환이는 잠바 입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서민을 돕고 새마을운동을 한다고 고생고생 하는데, 비서관이 시중의 풍설에 현혹돼 그런 보고로 국가원수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되겠느냐!”
참으로 허탈한 심정을 안고 대통령 집무실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박철언이 노태우 대통령 취임과 함께 친인척으로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처 고종사촌이니 세상의 그런 시선을 나무랄 수도 없었지만 박철언은, 억울해했다.
박철언은 노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 정책보좌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다른 수석비서관들보다 임명이 열흘이나 늦었다. 박철언은 이렇게 썼다.
“대통령 선거 직후 안기부에서 파악한 바로는 최병렬, 현홍주, 이종찬, 남재희, 심명보 등이 신주류로 떠오르고 있으며 이병기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문민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反) TK 세력 구축에 열을 올리면서 ‘친인척 불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전두환 대통령 초기부터 7년여간 ‘노태우 시대’를 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왔다는 것은 권력 내부에서 잘 알려지다시피 했다. ‘군번 없는 용사’처럼 열정을 쏟아온 나와 우리 팀은 맥이 풀렸다.”
특히 이병기(현 국정원장)는 그가 노 대통령의 정치 입문(1981년 정무장관) 때 비서관으로 발굴해 추천한 사람이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