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의 위헌 소지를 알고서도 국민 여론 등에 편승해 일단 법을 만들어 놓고 보자는 정치권의 졸속입법 행태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커지고 있다. 졸속입법은 과거에도 되풀이되어 온 국회의 고질적 폐해로 꼽힌다. 국회가 앞장서 만들어 놓았지만 위헌 시비에 휩싸인 국회선진화법을 비롯해 경제민주화법, 전두환추징법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회 스스로 입법기관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국민의 신뢰를 추락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포퓰리즘식 입법 되풀이
여야는 2012년 5월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지만 일부 조항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요구하는 대목이 포함되면서 헌법에서 규정한 다수결의 원칙 위반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지난해 4월 최경환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회선진화법이 되레 정치 불신을 가중시키는 국회 마비법이 되고 있다”며 개선을 제안했다.
결국 새누리당 내부에서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위헌 논란이 제기되자 ‘국회법 정상화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올해 1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스스로 만든 법에 대해 위헌 여부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
김영란법도 5일 대한변호사협회가 법 공포도 되기 전에 헌법소원을 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법안 상정에서 통과까지 2년 7개월이 걸린 만큼 정무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등에서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여론에 밀려 법안을 처리해 벌어진 ‘인재(人災)’다.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를 규제하기 위해 2013년 7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른바 경제민주화법에 대해서도 법 개정 당시 위헌 시비가 꾸준히 제기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보니 국회에서 통과되긴 했지만 한 달 뒤 대한변협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의원 입법이 법치주의에 역행하고 권력 분립의 원칙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법조계의 날 선 비판까지 나왔다.
앞서 2011년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 개정돼 이중 규제 소지가 있음에도 포퓰리즘적 입법이 이뤄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가 시행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규제 수위를 놓고 여야는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다.
○ ‘야누스법’ 양산 막아야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 특성상 시대적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새누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성매매특별법 추진 당시만 해도 성매매 근절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며 “입법 당시에 미리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부분을 담아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고 항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기관 스스로 위헌 소지를 안고 있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시대정신’ 운운하는 것은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법을 양산하는 궤변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표적 야누스법 사례가 전두환추징법. 법이 통과된 2013년 6월에는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은닉재산 몰수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높았다. 비자금 은닉 의혹이 제기된 지 한 달도 안 돼 이 법은 국회 본회의 문턱을 ‘일사천리’로 통과했다. 하지만 올해 1월 서울고법은 “헌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 적법 절차의 원칙에 반하고 국민의 재산권과 법관의 양형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헌재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 한 번 제정된 법률은 고치기 어려워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헌재의 위헌 결정이 나오더라도 쉽게 고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국회 법제실이 분석한 ‘위헌 결정 미개정 법률 현황’에 따르면 헌재의 위헌 및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불구하고 법령 개정이 완료되지 않은 법안이 10여 건에 이른다. 국가보안법처럼 법안 자체의 존폐에 대해 논의가 진행 중이거나 법 조항의 효력이 상실돼 추가적인 입법이 필요하지 않은 법안도 있다.
하지만 이익단체의 이해관계에 얽혀 국회에서 발목 잡혀 있는 법안도 있다. 약사법 개정안이 그렇다. 2002년 당시 헌재는 약사법의 ‘약사 또는 한약사가 아니면 약국을 개설할 수 없다’는 조항에 대해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일반인이나 법인도 약국을 개설할 수 있게 됐지만 약사회 등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법이 개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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