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도 대통령 출마하는데… 나라고 못할 것 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1일 03시 00분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30〉40년 지기 김우중

1991년 12월 1일, 노태우 대통령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왼쪽),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가운데) 등 15개 재벌사 회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남북경협을 위한 경제계의 협력을 당부했다. 열이틀 뒤인 12월 13일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그러나 정
 회장은 이듬해 1월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를 발족시키고 직접 정치의 길로 나선다. 동아일보 DB
1991년 12월 1일, 노태우 대통령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왼쪽),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가운데) 등 15개 재벌사 회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남북경협을 위한 경제계의 협력을 당부했다. 열이틀 뒤인 12월 13일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그러나 정 회장은 이듬해 1월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를 발족시키고 직접 정치의 길로 나선다. 동아일보 DB
내가 진로를 놓고 장고하고 있을 때 나와 김영삼(YS) 대표 간의 화해를 추진한 사람들도 많았다.

고교 동창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앞으로 당을 떠나든 아니면 남든, 또는 어딜 가게 되든 일단 YS와 만나 대화를 해봐라. 그러지 않으면 대인(大人)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김 회장은 거의 매일 나를 설득했다. YS의 측근인 정재문 의원도 몇 차례 나를 찾아와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이상연 안기부장, 김영구 사무총장, 최병렬 노동부장관, 홍성철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수성 전 서울대 총장까지 나를 설득했다.

1992년 6월 25일, 나는 결심하고 정재문 의원과 함께 하얏트호텔에서 YS를 만났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대표님을 민주화 지도자로 존경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당대회 전후로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YS는 그 특유의 침묵으로 듣기만 하다가 불쑥 한마디 했다.

“지난 일은 그만 얘기합시다. 당에 돌아와 앞으로 선거에서 나를 돕는 역할을 해주시오.”

다음 날 오후 5시, YS는 광화문에 있던 우리 캠프 사무실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이 의원, 경선과정에서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고 같이 갑시다. 여기 있는 분들도 이제 마음의 앙금을 털고 우리 같이 대선 승리를 위해 노력합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 좌중은 웅성대고 매우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대표님께서 여기 오신 뜻을 알겠습니다. 내일 대표님과 제가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래야 대외적으로도 새롭게 마음의 문이 열리고 묵은 찌꺼기가 청산되지 않겠습니까?”

“그럽시다.”

YS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표지가 까만 얇은 수첩에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내일 10시에 당사로 나오시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당사 대변인실로 전화를 걸었다. 대변인실 관계자는 기자회견 일정이 잡혀 있지 않다고 했다. 나는 대표실의 김기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비서는 당황해하더니 “대표님께서 이 의원님이 혼자 기자들을 만나서 회견을 끝내 달라고 하십니다”라고 전했다.

‘아! 나보고 백기 투항을 하라는 말이었군.’ 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요? 그러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자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얼마나 황당하고 격분했는지 ‘이런 것이 구정치의 음모로군’ 하는 배신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8월 17일 탈당 기자회견을 단행하기로 했다. 정말 어려운 결심이었다. 그리고 새한국당 창당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김우중 신당설’이 흘러나왔다.

김우중은 내가 보기에도 신당 창당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나는 그와 빈번하게 만났다. 한번은 민주당의 김원기 의원이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김우중 회장이 부쩍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신당에 참여하나?”

“정치가 국민에게 염증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기업에서도 관심을 표명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정주영 회장이 나오니 김우중도 나오는 것 아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배후에서 지원하는 수준이야.”

나는 이렇게 연막을 쳐 주었다. 그러나 김원기도 들은 얘기가 있는지 이렇게 부연했다.

“김우중을 만났는데 너무 쉽게 정치를 생각하는 것 같아. 언제든 동원 가능한 의원들이 원내의 약 3분의 1은 된다고 보고 있어. 앞에서 하는 말만 믿으면 정치인들은 모두 자기를 지지할 것처럼 보이겠지….”

10월 24일 ‘김우중 대선 출마설’이 각 신문에 톱기사로 실렸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우중은 나의 오랜 친구이고, 새한국당 창당을 추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창당 자금을 김 회장에게 의지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암암리에 확산되어 있었다. 사실 그는 초기에 나에게 약간의 자금을 지원했다.

10월 27일 김우중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밤늦게 힐튼호텔 23층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새벽 1시 30분까지 그와 대화했다. 내가 물었다.

“너…, 출마할 생각 진짜 있는 거냐?”

나의 노골적인 질문에 그도 솔직하게 답했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하겠다고 나서는데, 나라고 못할 것 있겠냐? 나이로 봐도 정 회장이야 고령이지만, 난 연부역강하지 않니?”

“너와 정주영 씨가 경쟁하게 되면, 이 나라 정치판은 재벌 싸움판으로 바뀌지 않겠냐?”

“나는 일단 하면 대우를 처음 시작할 때와 똑같은 각오로 나가려 한다.”

“그렇다면 기업을 완전 청산하는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믿겠냐?”

그는 움찔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잠시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들어갔다.

“네가 반대하는 것 같은데, 내가 다시 생각하지.”

몹시 서운한 눈치였다. 김우중의 출마 문제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그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나 자신 지금도 잘 모르고 있다.

이틀 뒤 다시 김우중을 만났다.

“네가 걱정하는 것, 마음에 새기고 정치하는 것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하루 사이에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 노태우 “대우가족 불행 초래… 그래도 출마할 겁니까” ▼

김우중 대통령 꿈 포기 뒤엔…


김우중은 1992년 10월 29일 아침 힐튼호텔로 찾아온 이종찬에게 “정치하는 것 포기하기로 했다”고 말한 뒤 곧바로 기자회견을 했다.

이종찬의 증언. “그는 당시 여러 가지 사실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지만 그는 이를 극구 부인했고, 김영삼 측에서 이춘구 선대위 상임부위원장을 보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또 청와대 요청에 따라 유혁인 공보처장관과 김동익 정무1장관, 그리고 김우중의 숨은 상담역인 김성진 전 문공부장관이 그를 설득했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김우중은 지난해 8월 싱가포르 국립대 경제학과의 신장섭 교수가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도 이때 이야기는 털어놓지 않았다. 아마 책의 주제가 ‘대우 흥망사’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그가 김우중 회장을 만류했던 비화(秘話)를 기록해놓고 있다.

“나는 비밀리에 김우중 회장을 불러 그의 진의를 타진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정치지향적인 인물들이 김 회장을 ‘국제 감각에 능통할 뿐 아니라 참신성이 돋보이는, 바로 국민들이 바라는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는 바람에 그의 마음이 끌려가고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노 대통령은 김 회장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김 회장 주변 사람들이 김 회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김 회장을 보는 눈,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김 회장을 보는 눈과 같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회장이 국제 감각에 익숙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참신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정주영 회장이 이번 선거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어려운 처지인데 김 회장까지 정치에 뛰어든다면 김 회장과 대우 가족, 나아가 국민들의 불행만 초래할 것이 내게는 훤히 보입니다. 그래도 출마할 작정입니까?”

이 말에 김우중이 멈칫 당황하면서도 “(제가 출마하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참신한 사람을 기르는 당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하기에 노 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정치라는 것을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그는 깔끔한 성미였다.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저는 정치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확실하게 밝혔다. 이런 비공식 대화가 있은 후 김 회장은 ‘새한국당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영입교섭이 들어와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김우중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가장 큰 오해와 비난을 받은 ‘피해자’는 이종찬이었다. 이종찬은 “내가 대통령 욕심이 있어서 김우중을 후퇴시켰다는 바가지를 온통 뒤집어썼다. 부인하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박철언은 훗날(2005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종찬 의원이 고단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1992년 10월 김우중 파동도 따지고 보면 이종찬 측의 애매한 이중전략 때문이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정주영#김우중#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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