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위반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는 추미애 의원이라는 여성 지도자가 있습니다. 국민경선을 끝까지 지키고 함께해온 정동영 최고위원도 있습니다.”
2002년 대선 투표를 하루 앞둔 12월 18일 오후 8시 5분 서울 종로 거리유세장.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연단 앞에 등장한 ‘차기 대통령 정몽준’이라는 푯말에 이렇게 불편함을 내비쳤다. 후보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패한 정몽준 후보 지지자들이 ‘노무현 다음은 정몽준’임을 못 박으려 했지만 노 후보는 되레 정동영 추미애 의원을 연단으로 불러올려 정 후보와 나란히 세웠다.
실제 정동영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새천년민주당을 깨고 친노(친노무현) 직계들로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주역이 됐다. 초대 당 의장과 통일부 장관, 또다시 당 의장을 지내며 ‘노무현 정부 황태자’로 불렸다. 하지만 2007년 6월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자 노 전 대통령의 만류를 뿌리치고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가 됐다.
정동영의 참여정부 실정론
그런 정동영의 입에서 “참여정부 시기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잘리고 죽었고 비정규직이 됐다. 부동산 폭등으로 중하층의 재산가치가 하락하고 중상층은 더 부자가 돼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를 향해 “(그런 부분에 대해) 먼저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새정치연합을 탈당해 4·29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에 국민모임 간판으로 출마한 처지임을 감안하더라도 참여정부에 대한 자신의 책임은 싹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에 문 대표는 “그쯤 되면 정치가 허무해진다”고 대꾸했다. 노 전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에서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고 했던 말이 연상된다. 문 대표의 측근인 정태호 새정치연합 관악을 후보도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든 주역도 정동영 아니냐”고 가세한다. 정 전 의원에게 “너 죽고 나 죽자는 거냐”며 달려드는 추미애 의원은 더 직설적이다.
새정치연합에서는 정 전 의원을 향해 “배신자”라고 비난하지만 문 대표도 노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으면서 그 시기의 주요 정책을 부정하는 자기모순을 범한 적이 있다. 2012년 대선 때 노무현 정부에서 결정된 제주해군기지의 건설 중단을 주장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재협상’ 의사를 밝힌 적도 있다.
노무현 정책 뒤집은 문재인
문 대표 쪽에서 정동영을 힐난할 수 있으려면 통합진보당에 이념적으로 끌려 다니며 참여정부 핵심 정책을 부정했던 잘못에 대해 깊은 자기반성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문 대표는 “공무원연금 개혁이 끝나면 국민연금도 소득대체율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이 역시 국민연금 고갈을 막기 위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낮추기로 했던 노무현 정부의 2007년 개혁을 거꾸로 뒤집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나와 우리 사회에 이익이 되느냐를 따져보기 전에, 당장의 이해관계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기회주의”라고 썼다. 노무현 정부의 중심에 섰던 두 사람이 서로 삿대질하며 책임 공방을 펴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국민들은 거북할 것이다. 4·29 관악을 보선은 정권심판론도, 경제실정론도 아닌, 누가 더 비겁한 참여정부의 배신자인가를 판가름하는 이전투구 무대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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