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은 ‘동북아연구모임’… DJP연합 작업이 시작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1일 03시 00분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33〉1997년 필승팀

1997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를 보면서 ‘당선 예감’을 나누고 있는 김대중 총재와 국민회의 수뇌부.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은 17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임채정 당시 정세분석실장이다. 동아일보 DB
1997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를 보면서 ‘당선 예감’을 나누고 있는 김대중 총재와 국민회의 수뇌부.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은 17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임채정 당시 정세분석실장이다. 동아일보 DB
1996년 4월의 15대 총선은 새정치국민회의의 완패로 끝났다. 나도 낙선했다.

김대중(DJ) 총재는 당사에 나타나지 않고 자택에 칩거하거나, 아니면 아태재단 사무실에 나와서 면회도 일절 사절하고 사태를 정관하고 있었다.

모두 사기가 떨어지고 절망한 시점에 나는 어떻게 하든지 이를 수습하고자 앞으로의 대책을 종합한 보고서 하나를 만들어 김 총재를 찾아갔다. 이름 지어 ‘97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 시안’이라는 보고서였다. 마침 권노갑 의원도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첫 번째 과업은 우선 재야를 포함한 야권단합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현 상황을 전제로 ‘국민회의 490만 표 + 민주당 220만 표 + α’라는 개념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이기택 민주당과의 재합당 내지 연합이다. 그렇지만 서로 감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황에서 과연 재결합이 가능할까?

두 번째 방안은 자민련과 연합하는 방안이다. 국민회의를 지지하는 ‘전체 야권표(710만)+α’에 자민련 지지표(400만 표)를 합치면 약 1200만 표 내외가 된다. 무난히 대선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이 가능할까? 나는 김 총재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정치의 출발점도 다르고, 철학도, 당의 이념도 모두 다른데 과연 연합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우선 총재님을 비롯하여 당원들이 납득하겠는지 그부터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내 말을 들은 김 총재는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있다가 불쑥 한마디 했다.

“이 의원은 나를 혁명투쟁가로 보는 모양인데, 나는 타협과 협상을 주장하는 의회주의자요!” 내가 기대했던 대답이었다.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나는 보고서를 챙기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즉시 가동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김 총재도 나에게 “이제 방향이 결정되었으니 내일부터라도 즉시 착수해주시오”라고 했다. 나의 보고서로 새로운 씨가 뿌려졌으니, 거두는 작업도 나보고 하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즉각 아태재단 3층에 별도의 전략기획팀 사무실을 준비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북아연구모임’으로 위장했다.

전략기획팀은 작업의 주무를 이강래 비서가 맡았고 전반적인 지원은 박금옥 비서가 담당했다. 이강래는 기획에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위원으로 아태재단에서 임동원, 황용배(후원회 처장), 당에서 천정배, 정세균, 배기선, 전병헌, 라종일, 박지원 등이 모여 하나씩 방침을 결정해 나갔다.

제1차 과제는 ‘김대중 대통령 이미지 만들기’ 작업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 총재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었다. 후보의 모든 것을 벗기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이 작업을 위해 어떤 선입견이나 개인의 감정을 떠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1987년, 1992년 선거 때는 모두가 DJ를 제왕처럼 받들 줄만 알았지 후보의 약점, 미비점을 보충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자성을 하고 있었다.

인간 김대중의 약점을 완전히 까발리는 작업을 진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총재간의 신뢰였다. 마침 김 총재에게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는, ‘밝은 세상’이란 기획팀이 있었다. 그 팀의 수장은 윤흥렬, 즉 김홍일 의원의 처남이었다.

우리 팀의 역할은 마치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과 같았다.

그렇다고 후보가 연기할 수 없는 것, 교정이 불가능한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후보의 전라도사투리를 교정하려 애쓴 일이 있다. 불가능했다. 차라리 이를 선용하는 방법이 더 좋지 않는가 생각했다.

그해 8월 15일 우리는 가족을 동반해 휴가를 간다는 구실로 제주도로 몰려갔다. 나의 친우가 운영하는 해안가 모텔을 통째로 빌렸다. 가족들은 관광을 보내고 우리 팀은 김 총재를 모시고 진지한 토론을 계속했다.

건의사항도 토의했다. 내가 말문을 열었다. “현재 당의 운영은 모두 총재 중심으로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10만 원짜리 사업결재도 총재가 결재해야 집행됩니다. 총재가 외부행사에 나가면 모두가 총재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고, 총재가 돌아오면 서로 결재를 먼저 받으려고 줄을 섭니다. 이는 비능률적입니다. 집안 살림에 대한 권한의 위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한을 두어 가령 500만 원짜리 이하는 총재 대행이 결재할 수 있도록 위임해야 합니다.”

DJ는 이해를 하면서도 한마디 짚고 넘어갔다. “그러면 누구를 대행으로 시키면 좋겠소?”

나는 그 순간, ‘혹시 내가 하고 싶다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아닙니다. 연령순으로 조세형 부총재를 먼저 시켜보시지요. 만약 못마땅하면 그 다음 김영배 부총재 순으로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요?”

다음 건의사항, “이제부터 총재님의 일정 스케줄은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짜여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총재님이 일정수첩을 보고 직접 결정했지만, 이제는 그 수첩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양보하지 않을 태세였다.

“아니 수첩에는 나만 알고 있어야 할 일정도 있는데 어떻게 모두 공개해요?”  
▼ “통반장까지 다 해먹을 겁니까”… DJ 향해 던진 박태준의 돌직구 ▼

박태준, DJ 만나 4가지 질문


“박 의원은 내게 솔직하게 물었다. ‘만일 집권하시면 호남 사람들이 다 해 먹을 것이라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또 김 총재님의 사상은 어떤 것입니까?’ 나 또한 솔직하게 답했다. 박 의원은 나와 생각이 같았다. 그의 식견은 뛰어났다. 이내 서로를 믿게 되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1997년 9월 박태준(TJ) 전 포항제철 회장을 만났을 때의 기억을 이렇게 남겼다.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 결과, 대한민국이 일본에 2 대 1로 역전승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정몽준 축구협회장의 초청으로 두 사람은 전날 경기를 함께 응원했다. 물론 정몽준 회장이 두 사람만 초청한 건 아니었다. 정주영 회장도 있었고, 신한국당의 이홍구, 김윤환 의원, 자민련 김용환 의원도 있었다.

사실 DJ의 도쿄행(行)에 대해서는 당내에서 반대가 없지 않았다. 그해 8월 들어 DJ는 각종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로 올라섰다. 그런데 도쿄까지 날아갔다가 막상 우리 대표팀이 지기라도 하면 그 비난을 온통 DJ가 뒤집어쓸 수도 있다고 측근들은 반대했다.

이종찬의 기억. “사실 ‘부자 몸조심 한다’는 말과 같이 이제 겨우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자칫 잡음이 들려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DJ는 “어디를 가나 진흙탕은 있게 마련이다. 그걸 피하면 목표에 다가가기 어렵다”며 도쿄행을 강행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내심 TJ를 설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TJ를 잡으면 자기와 이회창 후보 사이에서 막판까지 저울질을 하고 있는 JP(김종필)의 마음도 붙들어 맬 수 있었다. DJP협상은 벌써 1년여를 끌고 있었다.

그날 아침, TJ는 DJ에게 4가지를 물었다. TJ 개인의 질문이라기보다, 반(反) DJ 진영이 뼛속까지 품고 있던 의심을 가감 없이 전달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레알 돌직구’였다.

4가지는 첫째 집권하면 전라도 사람들이 통반장까지 다 해 먹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둘째 김대중은 빨갱이 아니냐, 셋째 거짓말쟁이 김대중을 어떻게 믿느냐, 넷째 ‘광주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통반장까지 다 해 먹고 싶어도 전라도엔 그만한 사람이 없다!” DJ는 이런 식으로 TJ를 설득했다. 그가 자서전에 쓴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DJ가 광주 문제에 대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DJ가 자서전에 남긴 TJ의 질문도 ‘집권하면 호남사람들이 다 해 먹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와 ‘김 총재의 사상은 어떤 것이냐?’ 두 가지뿐이다.

세 번째 질문은 그렇다 쳐도, 마지막 ‘광주사태’에 관한 질문은 DJ가 일부러 기록에 남기지 않았을 수 있다. 추측 가능한 대답은 ‘박 회장의 질문과 우려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정도일 텐데, 그런 대답도 자칫 ‘광주사태는 좌익폭도들의 소행’이라는 신군부의 주장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동북아연구모임#DJP연합#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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