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 전문기자의 안보포커스]해군, 충무공 정신으로 환골탈태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5일 03시 00분


윤상호 기자
윤상호 기자
임진왜란 발발 12년 전인 1580년(선조 13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전라 좌수영의 발포(현 전남 고흥군)에서 수군 만호(萬戶)로 근무했다. 만호는 종4품의 지방무관으로 지금의 대령 계급에 해당한다.

어느 날 전라 좌수사가 보낸 심부름꾼이 이순신을 찾아왔다. 그는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 몇 그루를 베어오라”는 좌수사의 명을 전달했다. 전라 좌수사(정3품)는 이순신보다 세 계급이나 높은 데다 인사권을 쥔 직속상관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상관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왜구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악기를 만들려고 나라의 재산인 귀한 목재를 허비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오동나무는 판옥선의 주요 재료였다. 그 열매에서 뽑아낸 기름은 화살의 중요 원료로 사용됐다. “상관을 거역하면 후과(後果)가 따를 것”이라는 주위의 경고에도 이순신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후 상관의 눈 밖에 난 이순신은 갖은 음해와 핍박으로 파직 등 불이익을 겪었지만 부대 내 전횡과 비리 척결에 힘을 쏟았다. ‘적을 이기려면 내부의 적부터 이겨야 한다’는 소신이었다. 군율과 기강이 바로 선 군대로 난세의 격랑을 뚫고 겨레를 구한 성웅(聖雄)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400여 년이 흐른 지금, ‘충무공 후예’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방위산업 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두 명의 전직 참모총장을 비롯해 전현직 해군 장성 6명이 줄줄이 재판에 넘겨졌다. 성희롱 의혹 등 일탈행위로 옷을 벗은 고위 장성들도 한둘이 아니다.

‘난파선’ ‘해군 해체’라는 국민적 질타와 공분이 쏟아지고 현직 총장도 부하들 앞에서 ‘도둑놈’ ‘천덕꾸러기’로 지탄받는 참담한 현실을 개탄했다. 도저히 충무공 앞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다는 자조가 나올 법하다. 올해로 창설 70주년을 맞는 해군이 자축은 고사하고 좌초 위기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어쩌다 해군이 비리와 일탈의 온상으로 전락했을까. “구조적 요인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간 거래를 통해 완제품으로 도입되는 공군 무기나 대부분 국내에서 조달되는 육군 무기와 달리 해군 무기는 수천 종의 부품을 외국업체로부터 직접 구매하는 과정에서 농간이 개입될 소지가 적지 않다.

해군 특유의 ‘패거리 문화’도 고질적 비리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해군은 초급장교 시절 함정에서 맺은 상하관계가 유달리 끈끈하다. 바다에서 수개월간 동고동락하며 쌓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식이 군 생활을 좌우한다는 얘기다. 특히 함장의 ‘제왕적 권위’는 타군 지휘관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이런 풍토에서 예비역 선배가 금품과 취직 등을 미끼로 유혹할 경우 후배는 뿌리치기 힘들다. 상관의 불의를 봐도 빗나간 동료애로 눈을 감거나 내부 고발자를 ‘왕따’시킬 개연성도 높다.

실제로 6년 전 상관들의 납품 비리를 양심 선언한 김영수 소령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좌천인사 등 혹독한 보복 끝에 군복을 벗었다. 당시 그를 무책임하고 일신만 추구하는 파렴치 군인으로 매도한 이가 비리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된 정옥근 전 총장이었다.

주요 보직을 해사 출신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폐쇄적인 인사 관행도 비리의 싹을 키우는 토양이다. 외부의 견제와 감시를 기피하는 순혈주의 조직은 곪고 병들기 마련이다. 두 전직 총장을 포함해 비리에 연루된 전현직 해군 장교들은 모두 해사 출신이었다. 통영함 납품 비리의 주범이 ‘해사 마피아’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래서야 해군을 믿고 영해와 국민의 안위를 맡기겠느냐는 우려를 수뇌부는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한다.

경남 창원시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된 실물 크기의 거북선 내부에는 ‘충무공 정신’ 액자가 놓여 있다. ‘정의를 앞세우고 책임을 완수하며, 희생을 감내하라’는 내용이다. 정의가 실종되고, 책임이 사라진 총체적 난국의 해군을 꾸짖는 충무공의 호령처럼 들린다. 이제부터라도 해군이 뼈를 깎는 치열한 자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이상 물러설 곳도, 떨어질 곳도 없다는 자성이 구호에 그쳐선 안 된다. “더이상 나를 욕보이지 말라”는 충무공의 통곡이 들리지 않는가.

윤상호 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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