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성역없는 수사” 선언…유체이탈 화법으로 매도 당하고
출국전 金대표와 회동 ‘결단’도…“다녀와서 결정?” 핀잔 이어져
점점 희화화 되는 박근혜 정부…무엇으로 진정성 회복할 것인가
“공직사회에서 흔히 정의의 반대말은 불의가 아니라 의리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청탁은 낯선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5일 국무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시 국무회의에서 이성보 국민권익위원장의 ‘부패관행 개선 추진실적’을 보고받은 뒤 ‘의리 경계론’을 편 것이다.
하지만 성완종 감독, 이완구 주연의 ‘메모지 휘날리며’를 보고 있자면 박 대통령의 경계는 완전히 빗나갔다. 성 감독과 의리를 지킨 ‘청탁남’들은 건재하고, 의리를 저버리고 성 감독의 전화를 ‘씹은’ 이들은 정치적 생명이 위태롭다. 배우 김보성이 옳았다. 남자는 역시 ‘의리’다. 평소 ‘비타500’을 건넨 사람의 전화는 반드시 ‘받으∼리!’
이 블록버스터의 압권은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등장이다. 성 감독은 “난 MB(이명박 전 대통령)맨이 아니에요”라고 절규하며 검찰발(發) 블록버스터 ‘최종병기 별건수사’에 맞섰다. 그런 성 감독이 영화 도입부에 ‘난 성완종을 잘 몰라요’라는 홍 지사의 절규를 배치한 것은 정말 독창적이다. 성 감독에게 코가 꿴 하고많은 정치인 중 왜 하필 ‘덜 친한’ 홍 지사를 캐스팅했을까.
확실한 증인이 있는 사안을 미끼로 던져 메모의 신뢰를 높이려 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흥행을 위한 ‘극적 장치’일 수도 있다. 홍 지사가 누군가. MB의 입에서 “(우리 정부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란 ‘블랙유머’를 이끌어 낸 장본인이다.
홍 지사는 2011년 9월 말 청와대 안가에서 MB를 만나 조만간 구속될 다섯 사람의 이름을 차례로 읊었다. ‘왕의 형’ 이상득부터 최시중, 박영준까지…. 분을 못 이긴 MB는 느닷없이 회의장을 박차고 들어가 대본에도 없는 애드리브를 날렸다가 두고두고 비웃음을 샀다. 이 일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홍 지사가 MB를 겨냥한 사정의 첫 제물이 될 판이다. 이 얼마나 극적인가. ‘사정 저승사자’에서 ‘사정 대상 1순위’로 전락한 이완구 총리의 끝없는 추락을 암시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장치는 없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사랑을 독차지한 우병우 민정수석이 총괄하는 사정의 칼날에 정작 김 전 실장이 베인 건 극적 반전(反轉)의 하이라이트다.
당분간 이만큼 스토리가 탄탄한 ‘서스펜스 스릴러’를 만나긴 힘들 듯싶다. 여기에 흥미 요소도 적지 않다. “세상에 대선자금이 고작 2억, 3억 원이라니 우리 사회가 정말 맑아졌다”는 별난 긍정론부터 “정홍원 전 총리를 다시 옹립하자”는 자학적 회의론까지 기발한 패러디가 넘친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점점 희화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학생의 학교생활기록부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리더십이 뛰어나나 따르는 학생이 없음.’ 현재 박 대통령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박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으나 믿는 국민이 드묾.’
박 대통령의 ‘성역 없는 수사’ 의지마저 ‘유체이탈 화법’으로 매도당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독대하는 ‘나름의 결단’을 두고도 “고작 ‘(이 총리의 거취를 순방) 다녀와서 결정하겠다’는 말이나 하려고 만났느냐”는 핀잔이 뒤따른다. 앞으로 검찰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든 상당한 비난과 조롱이 박 대통령을 향할 것이다.
필자는 현재 박 대통령의 남미 순방을 동행 취재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1주년 당일 출국’이란 엄청난 비난을 감수하며 강행한 순방이다. 경제 지평을 남미로까지 넓히겠다는 박 대통령의 의지는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순방=외유’라고 믿는 국민이 점점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 무엇으로 진정성을 회복할 것인가. 이는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문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메시지 관리’만 잘해도 지지율 반등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끌어올린 지지율은 ‘싱크홀’보다 더 쉽게 주저앉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반복돼 온 패턴이다.
진정성은 실행이다. 공무원연금 개혁만 해도 그렇다. 여당에 숙제 제출을 닦달하는 담임선생님 코스프레는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다. 피 같은 세금 80억 원을 매일 밑 빠진 공무원연금에 쏟아 붓는 게 정말 안타깝다면 직접 야당을 만나고 공무원노조를 설득해야 한다. 노동시장 개혁도, 경제 활성화 법안도 다르지 않다. 박 대통령에겐 시간도, 국정동력도 별로 없다. 진정성마저 의심받는 상황에서 ‘메시지 정치’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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