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북한에 진출한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3일 03시 00분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사기꾼은 공산주의자보다 더 악질인 듯싶다. 인민을 공산주의자로 개조한다고 수십 년 세뇌시킨 북한이지만 사기꾼은 갈수록 더 늘어난다. 물론 수법이야 남쪽사람에겐 식상하겠지만.

북한이 나름대로 시스템을 유지하던 1980년대 ‘북한판 박인수’ 사건이 항간의 화제가 됐다. 일개 노동자가 김일성 주석궁에 물자를 조달하는 고위 군관을 사칭해 수많은 여성을 농락했다. 호위총국 상좌(중령과 대령 중간계급) 군복을 입고, 일반 사람은 구경하기 힘든 김일성 명함 시계를 차고 다니니 여성들이 줄줄이 속아 넘어갔다. 한 여성과 동거하다 돈을 얻어내곤 출장을 떠난다며 다른 여성 집에 가 머무르는 수법을 반복하다 잡혔다. 사람들은 김일성 이름을 팔고 다닌 그 배짱에 놀랐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 들어간 이후 갑자기 사기꾼이 급증했다. 특히 장마당 경제를 주도하는 여성들 속에서 사기 범죄가 크게 늘었다. 오죽하면 평양에 ‘여성범죄단속그루빠’까지 생겨났을까.

초기 사기수법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자전거 장사꾼에게 흥정을 붙이다 자전거를 타보겠다고 말한다. 그러곤 함께 온 사람에게 지갑을 맡기고 주변을 도는 척하다 갑자기 사라진다. 뒤늦게 장사꾼이 남은 사람을 족쳐 봐야 “내 물건도 산다 해서 따라왔는데” 또는 “아깐 지갑에 달러가 가득했는데”라는 식의 뻔한 대답만 돌아온다.

사기수법은 점점 진화한다. 몇 년 전 평양에서 있었던 일이다. 할머니 홀로 사는 집에 한 처녀가 짐을 잔뜩 갖고 와 적잖은 돈을 내놓으며 “장사하러 평양에 왔는데 일주일만 묵자”고 했다. 처녀 방엔 매일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하루는 처녀가 손님을 데리고 와 술상을 거나하게 차리더니 “어머님 한잔, 선생님 한잔” 하며 대접하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알고 보니 할머니 집을 자기 집이라고 속이고 5000달러에 팔아먹었다. 처녀의 짐 속엔 헌 천 쪼가리만 가득했다. 정체를 모르니 어디 가서 잡아야 할지도 막막하다.

북한에서 사기당한 중국 사업가들도 수두룩하다. 가장 고전적 수법은 담당자 바꿔치기다. 북한의 모 기관을 대변한다는 사람이 중국 사업가에게 온갖 감언이설로 투자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투자하고 나면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감당하지 못할 조건을 내민다. 중국인이 항의하면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1990년대 후반 이런 일도 있었다. 북한에 돈을 떼인 중국 사업가 수십 명이 관광하는 척 평양에 단체로 들어가 노동당 중앙당사 앞 고려호텔에 투숙했다. 중앙당사 앞에서 기습시위라도 하면 북한 당국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계획대로 이들은 다음 날 오전 호텔 앞에 일제히 모여 시위를 시작하려 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북한 안내인이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 거리를 지나던 북한군 승용차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차에 탔던 군관 두 명은 북한 안내인이 중국인 관광객에게 멱살을 잡힌 것을 보고 분노했다. 이들은 전후사연도 모른 채 차에서 시동을 걸 때 쓰는 쇠막대기를 들고 달려와 중국 사업가들에게 마구 휘둘렀다.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나 쇠몽둥이를 휘두르자 사업가들은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나중에 이 일을 안 중국대사관은 북한 정부에 자국민들을 부상시킨 데 대해 사죄할 것을 요구했고 북한은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군인들이 아주 잘했다”고 치하했다. 군관들은 크게 승진했다.

과거 북한은 항상 중국에 사기를 치는 존재였다. 하지만 시장경제 활동이 본격화된 최근에는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사기당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중국인과의 상거래가 활발한 나선시에서 이런 사례가 적잖다.

중국 사기꾼들은 북한 사람들이 상대적 ‘선진국 국민’인 중국인을 믿는다는 점을 악용한다. 이들은 사업가로 위장해 북에 가서 친분을 쌓은 뒤 물품을 싸게 사주겠다며 돈을 받는다. 물론 중국에 있는 일당에게 전화를 요란스레 해서 상대를 안심시키는 것은 필수 코스다. 중국 사기꾼이 달아나면 북한 사람은 찾을 길이 없다.

북한에서 이런 사기 피해가 속출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옌볜에서 번창하던 보이스피싱 조직이 한국 당국의 대처로 기세가 꺾일 때와 일치한다. 한국을 상대로 전화사기를 치던 조직이 눈을 돌려 북한 맞춤형 사기수법을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과 북을 사기쳐먹는 전화 속 그놈 목소리는 언제면 사라질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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