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6월 10일, 새정치국민회의 안에 야권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위원회(대단추)가 처음으로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한광옥, 부위원장은 박상천이 맡기로 했고, 위원으로 조세형, 김봉호, 김영배, 김근태, 박상규, 이종찬, 김인곤, 임채정 그리고 간사로 박광태가 임명됐다. 자민련과 친숙한 사람들 또는 재야와 유대가 깊은 인사들의 두 부류로 구성된 것이다. 대단추가 구성됨으로써 일단 국민회의 내부 정리는 끝난 셈이다.
7월 초 어느 날 자민련의 이태섭, 이건개 그리고 국민회의 김근태 의원과 함께 저녁을 같이하면서 단일화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이건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무조건 김대중 후보로의 단일화를 전제로 따라오라는 식인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자꾸 돌면 당내 사기에도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내각제가 후보단일화의 수단처럼 비치고 있는데 이것도 문제입니다. 정권교체는 내각제를 확실히 담보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며칠 후 JP와 가장 가까운 한병기 전 캐나다대사를 만나 진지하게 얘기했다. “국민회의는 김종필 총재를 반드시 공동정권의 수장 가운데 한 분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내각제는 지금 당장은 실현하기 어렵지만 국민회의가 단일화를 위해 마지못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형 권력의 안정화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민련 내에서는 후보단일화를 끝까지 늦추어 그 사이 다른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이를테면 당시 JP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이동복 의원은 공개적으로 ‘후보단일화 3단계론’을 내놓고 초를 쳤다. 1단계로 우선 내각제 실시시기에 대하여 논의하고 또 연립정권의 지분을 분명하게 해놓아야 한다. 2단계는 후보단일화의 조건, 원칙, 방법에 대하여 협상한다. 3단계에 가서 단일후보를 선출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미룬다면 후보단일화는 11월에 가서야 결론이 날 것이다. 나는 수차례에 걸쳐 이동복에게 후보단일화의 불가피성을 설득했지만 그는 딴생각이 있어서인지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이런 지연작전에 발맞추듯 JP도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정치생명을 불사를 것이다” “내가 제일 보기 싫어하는 것은 타다 남은 장작개비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는 등의 교언(巧言)으로 사람들을 헛갈리게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1997년 9월경 사업 문제로 평양에 다녀온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방북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권영해 안기부장에게 찾아간 일이 있었다. 이때 권 부장이 이렇게 부탁했다. “김대중이가 집권하면 우리 경제는 완전히 깨지고 맙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막아야 합니다. 지금 야권후보 단일화를 위한 교섭이 진행 중인데 이를 저지해야 합니다. 김 회장이 자민련의 교섭창구인 김용환 의원과 친하지 않습니까? 단일화를 포기하도록 잘 설득해 주십시오.” 안기부장의 부탁이지만 이는 명령이나 같은 것이다.
김우중은 즉시 김용환에게 권 부장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김용환은 이를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김 회장, 대우는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인데 자칫 다른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업에 전념하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갈하고 김우중을 조용히 타일렀다.
사실 김용환은 이미 1996년 말, JP의 지시를 받고 따로 DJ를 은밀히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광옥과의 협상은 ‘형식적’으로 진행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JP가 그 순간에도 뒤에서 이중플레이를 하는지는 김용환도 몰랐다. JP는 YS와 따로 내각제 합의를 하고자 했다. 어느 날 매일경제에 JP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됐다. “국가가 편안하게 되려면 김영삼 대통령이 영단을 내려 중대결심을 해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대선을 중지하고 비상사태라도 선포하여 내각제 개헌을 하라는 압력이었다. 김용환도 놀랐다. 즉시 이동복에게 확인해본 다음에야 JP의 진의를 알았다.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가니 김용환도 모르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용환은 즉각 당 정책연구실장을 맡고 있던 측근 송업교 의원에게 확인했다. 송업교는 JP의 밀명을 받고 시내 사무실에서 헌법개정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진용은 청와대와 JP가 보낸 인물들이고, 권영해 부장이 파견한 안기부 요원도 섞여 있다고 했다. 그리고 헌법학자인 한태연 교수가 그 자리에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김용환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영해 부장이 김우중 회장을 통하여 전한 말은 결국 “JP와 다 합의된 사항인데 왜 김용환 네가 초를 치고 있느냐? 이제 그만두어라”라는 뜻이었다. 그는 JP의 이중성에 새삼 놀랐고 또 크게 실망했다. 결국 이 계획은 마지막 단계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 중단은 불가하다”고 거부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김용환은 JP와 정치행로를 달리하게 되고 2001년 한나라당으로 돌아간다. 2002년 16대 대선 때 김용환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JP의 연대를 끝까지 반대한 데는 이런 원천적인 불신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미루어 짐작해 본다. ▼ DJ, 자민련 김용환과 비밀회동… “이 얘긴 절대 새나가면 안돼요” ▼
대선 1년 앞두고… DJ 증발 사건
1996년 11월 1일은 금요일이었다. DJ의 동선이 하루 종일 오리무중이었다. 여의도 당사에도, 일산 자택에도, 아태재단 사무실이나 동교동 김홍일 의원의 자택에도, 어디에도 총재의 흔적이 없었다.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머뭇거리며 “어딘지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금방 감이 왔다. DJ가 누군가 중요한 인물을 만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럼 더이상 질문하면 안 된다. 그건 동교동 비서들 사이에서 일종의 철칙 같은 거였다.
그걸 알면서도 도대체 DJ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목동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DJ 비서 출신인 장성민 전 의원이 2012년 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과 함께 펴낸 ‘김대중 다시 정권교체를 말하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DJ의 증발’이라는 소제목 아래….
장성민은 이희호 여사의 여동생 이미호 씨를 ‘이모’라고 부르며 따랐다.
“이모님, 전데요, 혹시 거기 계세요?” 장성민이 묻자 이모는 목소리를 최대한 죽여서 말했다. “나중에…. 지금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통화하기가 그래요.” 이모는 원래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형부(DJ)가 머무르고 있을 땐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장성민은 바로 목동으로 달려갔다. 수행비서들의 입이 쫙 벌어졌다. “아니, 어떻게 알고?…”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자그마한 체구에 안경을 낀 사람이 방에서 나왔다. DJ가 마루까지 나와 “잘 가시라”고 했다. 그러곤 장성민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예, 혹시나 해서 들렀더니…. 드릴 보고서가 있습니다.”
“여기서 있었던 얘기가 절대 새어나가면 안 돼요. 보고서는 두고 가세요.”
‘자그마한 체구에 안경을 낀 사람’은 김용환이었다.
일주일쯤 뒤 DJ는 그날의 대화 내용을 장성민에게 말해줬다.
김용환=국민회의가 당론을 내각제로 바꾸고 대선에서 승리하면 곧바로 내각제 개헌을 한다고 공약해 달라.
DJ=15대 국회 때 개헌은 어렵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내각제 개헌을 한다면 누가 표를 주겠나.
장성민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럼 의견 일치를 본 부분은 없습니까?” DJ가 말했다. “후보 단일화와 집권 후 내각 분배는 내년 6월부터 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모았어요.”
두 사람의 회동 사실은 거의 한 달이 지난 11월 말쯤 공개됐다. 장성민은 책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당시 언론은 DJP가 제대로 안 될 것 같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게 아니란 걸 알려주려고 동교동의 한 핵심 측근이 회동 사실을 언론에 슬쩍 흘려준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DJ가 그보다 몇 달 전 있었던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진행자 이경규 씨의 일산 자택 기습 인터뷰 사건은 ‘1996년의 기억’으로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면서도 김용환과의 ‘목동 비밀회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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