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이진녕]“무상급식 포퓰리즘과 싸운 정치, 2016년 총선에서 평가받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7일 03시 00분


오세훈 전 서울시장

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 언제든 이 사람을 만나면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지. 오세훈 전 서울시장 얘기다. 그는 서울시장에 재선된 지 1년 뒤인 2011년 8월 시장직을 걸고 무상급식 찬반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쳤다가 실패했다. 엄밀히 말하면 투표율이 개표 기준인 33.3%에 미치지 못해 투표함도 열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시장직을 걸고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대로 정치를 떠나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아주 정치를 떠났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자금에 족쇄를 채운 ‘오세훈법’의 창안자로서 지금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성완종 게이트’를 어떻게 보는지도 궁금하다.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 22일 고려대 연구실에서 두 시간 동안 그를 만났다.》

‘野大 서울시의회’서 내 구상 안먹혀

―시장직을 떠난 지 3년 8개월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영국에 가서 복지에 대해 공부하고 중국에서 어학연수도 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중·단기 자문단의 일원으로 중남미 페루에서 6개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6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길을 떠났고, 그 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은 고려대에서 석좌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서울시장까지 지낸 사람이 KOICA 자문단 활동은 뜻밖이다. 계기가 뭔가.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특임교수로 지방자치와 국가브랜드에 대해 강의하면서 ‘가치(value)’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공존, 화해, 배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앞으로는 이런 것들이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고 이런 가치들을 어떻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래서 나 스스로 이런 것들을 솔선수범해 보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이런 가치들을 주장할 기회가 있을 때 힘이 실릴 것이라는 판단도 했다. 방법을 찾다 KOICA를 알게 됐다.”

페루와 르완다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묻자 오 전 시장은 신명이 나서 세세히 설명했다. 결론은 가르치러 갔다가 배운 게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현지에서 ‘리마일기’ ‘키갈리일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했다. 이를 모아 곧 책으로 출간한다.

―우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부터 묻자. 왜 무상급식 찬반을 주민투표에 부쳤나. 자신 있었던 건가, 아니면 모험이었나.

“엄밀하게 따지면 내가 주민투표에 부친 것은 아니다. 당시 서울시의회를 야당이 70%를 차지해 내가 구상하고 벌여놓은 일들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식물시장’이나 다름없었다. 무상급식을 소득 하위 30%에서 50%, 심지어 70%까지 양보했지만 야당 의원들은 ‘중앙당의 지시’라며 거부했다. 그렇다면 주민투표에 부쳐 보자고 제안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그걸로 내 제안은 끝났다. 그런데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들이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시민 8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제출했다. 법적 요건을 갖춘 것이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야당 의원들과 좀 더 타협하지 못했나.

“시청 조직개편안을 의회에 보냈는데 부결해 내가 거부권을 행사했더니 재의결해 버렸다. 각종 사업은 고사하고 조직 개편 하나 할 수 없었다. 타협책으로 들어오는 게 인사나 이권 청탁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것을 받아주며 정치할 수 있나.”

―그래도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건 건 너무 과한 것 아니었나.

“솔직히 주민투표에서나마 이기고 싶었다. 만나 본 대다수 오피니언 리더들도 권했다. 결과적으로 ‘안철수 현상’이 나타나고 박원순 씨가 시장이 되면서 보수층 가운데 (내가) 시장직을 건 데 대해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를 지지하고 시장으로 뽑아준 분들에게는 과격하게 시장직까지 건 데 대해 마음 깊이 미안하고,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반성한다. 그러나 무분별한 무상복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게 나중에 틀림없이 밝혀질 텐데 누구 하나 정치적 명운을 걸고 싸워본 적이 없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는가.”

그는 그로부터 불과 3년 남짓 만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 갈등, 연말정산 파동, 증세 논쟁을 거치면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많아진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강조했다. 복지논쟁 때문에도 오 전 시장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현실로 돌아오자. 오세훈법을 만든 당사자로서 성완종 게이트를 어떻게 보는가.

“한마디로 후진적 정치문화와 후진적 기업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터진 사건이 아닌가 한다. 아직도 정치자금이 논란이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막바지 단계 아니겠나.”

‘오세훈법 완화’ 이해 안돼

―어떻게 막바지라고 단정하나.

“법망이 촘촘해지고 국민의 감시도 늘어나면서 ‘돈 정치’에 대한 제약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사실 기업이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부를 창출하는 행태는 후진국이나 개도국에서 가능한 일이다. 사회가 발전하면 이런 것들이 발붙이기 어렵다. 우리 기업들의 풍토나 문화가 선진사회에 많이 근접했는데 유독 건설업종은 더딘 편이다. 권력에 줄을 대는 식으로 입찰을 따내고, 덩치를 키우고, 죽은 기업도 살려내는 성완종식 경영이 지속됐고 비자금 만들기도 쉬웠다. 그러나 갈수록 그런 ‘땅 짚고 헤엄치기’ 방식은 통하기 어렵다. 해외에 나가 보니 건설업종도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해 실력을 쌓지 않고선 경쟁에서 도태할 수밖에 없다.”

―11년 전 오세훈법을 주도한 배경이 궁금하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주도한 것은 아니고, 이를 위해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아니다. 16대 국회 말인데 내가 관심을 가졌던 건 5, 6공 인사들의 용퇴였다. 이회창 씨가 두 번이나 대선에서 패하고 한나라당이 부패정당으로 낙인찍혔던 터라 이들의 용퇴 없이는 건강한 보수정당의 존립이 어렵다고 봤다. 이들의 용퇴만 주장할 수 없어 내가 먼저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그랬더니 최병렬 대표가 마침 잘됐다며 누구도 맡길 꺼리는 국회 정치개혁특위의 야당(당시는 한나라당이 야당) 간사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래서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심정으로 센 안을 만들게 됐다.”

―여야의 반발이 심했을 텐데….

“생각해 봐라. 수십 년간 지속된 지구당을 없애고, 단체와 법인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고, 1억 원이 넘던 국회의원 한 명에 대한 개인 1인당 정치자금 기부액을 500만 원으로 줄이고, 국회의원의 연간 후원금 수령 한도를 1억5000만 원(전국 선거 때는 3억 원)으로 제한했는데 어느 정치인이 좋아하겠나. 더구나 주먹구구식이던 정치자금의 회계처리 방식을 공무원의 판공비 처리하듯 투명하게 바꿔 정치자금 입·출입에 대한 통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했다. 당장 여당 간사부터 난색을 보였다. 심지어 대한상의 회장까지 찾아와 ‘이렇게 하면 기업의 의지를 어떻게 정치권에 관철할 수 있나’라며 항의했다. 계속 버티기로 나갔더니 보수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언론까지 나서서 거들어줘 법으로 통과시킬 수 있었다.”

―제약이 너무 심하다는 볼멘소리가 정치권에서 많이 나온다. 올 2월 중앙선관위에서 개정 의견도 냈고….

“당시 정치자금 규제는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정치인들이 건전한 정치활동을 하고 민의를 수렴해 입법 활동을 하는 데 그 정도의 돈이 적은 것인가. 선관위가 앞장서 지구당을 부활하고, 단체 및 법인이 선관위를 통해 정당에 기부할 수 있게 하는 의견을 낸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지구당은 돈 먹는 하마 같다. 기업이 선관위를 통해 기부하고 이를 의석수에 비례해 정당에 나눠 준다는 것은 시장경제질서하의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또 그런 기부를 어느 기업이 하겠나. 1단계로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실효성이 떨어지니 직접 정당에 기부할 수 있게 하자’고 고치려는 수순이 아닌지 의심까지 든다. 물론 11년이나 지났으니 물가상승률에 맞춰 기부 한도와 후원금 한도를 조정해 주는 정도는 필요하다고 본다.”

의원 수와 비례대표 늘리기 불필요


―선거구 개편과 관련해 비례대표와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자는 주장도 나온다.

“국회의원 300명도 많다는 게 일반적인 여론 아닌가. 민주주의에서 민의를 존중해야 한다면 그런 민의는 존중해야 마땅하다. 비례대표도 지금 같은 양상이라면 늘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 과연 얼마나 각계의 전문성 있는 인사들이 국회에 들어가 전문적인 활동을 하는지 객관적으로 검증해봐야 한다. 선거구 개편은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놓는다면 얼마든지 합리적인 조정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시 복지 얘기를 해보자. 영국에서 복지를 공부했다고 했는데 무엇을 배웠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청년 주택수당과 대학등록금 절반 국고 보조를 하루아침에 싹 없애면서 복지 대(大)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경제위기 직후라서 그런지 사회적 저항도 별로 없었다. 그걸 보고 복지 선진국이라는 영국도 재정 앞에서는 별수 없구나, 형편이 넉넉할 때 많이 나눠주고 형편이 안 될 때 거둬들이는 게 복지구나, 복지에 대한 고민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다시 정치를 할 생각은 없나. 대선의 꿈은….

“정치인을 나는 ‘역사를 쌓아 올려가는 벽돌’이라고 여긴다. 그 벽돌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의미 있는 정치를 한 게 아니겠나. 지금 우리 정도의 민주주의 발전 단계에서 최대의 적은 포퓰리즘이라고 본다. 내가 그 적과 싸우기 위해 제 역할을 다했는지 다시 한 번 국민의 심판을 받아 보고 싶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정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년 총선이 정치 재개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다음 단계의 정치는 그 이후에 생각해 보겠다.”

20년간 모은 재산 부끄럽지 않다


오 전 시장은 사람들에게 부자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서울시장으로서 2011년 마지막으로 신고한 재산은 58억 원이었다. “어릴 때 정말 무지하게 가난하게 자랐는데 사람들은 겉으로만 보고 내가 부잣집 자식인 양 여긴다. 20년간 변호사로 일하며 돈을 모았다. 돈 많다는 게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 벌어 놓고 정치하기를 잘한 것 같다. 남의 돈을 받아 정치하려면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사람 자체가 부패하는 게 아니고 돈이 사람을 부패시키는 법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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