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여류 작가는 보지도 못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드는 대목들이 있다. 그런 시오노가 현대 남성 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이는 미국 배우 게리 쿠퍼다. 잘생기고 교양 있는 데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서부의 사나이 역할을 누구보다 멋지게 소화한 배우다. 미국이 세계의 선망을 받던 시절, 멋진 미국 남자의 이미지 그 자체라고나 할까.
▷시오노는 아베 신조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고대 로마에 빗대기 좋아하는 그의 상상력은 간혹 황당해서,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로의 승계가 팍스 로마나의 시대를 열었듯이 고이즈미 준이치로에서 아베 신조로의 총리 승계가 일본을 구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도 아베가 직구만 던질 줄 알았지 변화구는 던질 줄 모른다는 데는 불만이다.
▷아베 총리가 미국 상·하원 연설에서 에이브러햄 링컨과 게리 쿠퍼를 언급했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을 언급해 환심을 사려는 것이지만 두 사람 다 아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아베는 시오노와는 달리 쿠퍼와 동시대를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쿠퍼가 죽었을 때 아베는 고작 일곱 살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 하숙집 여주인이 사별한 남편에 대해 ‘쿠퍼보다 잘생겼다’고 자랑한 사실을 인용했을 뿐이다. 쿠퍼를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말하지 않았다.
▷영화 ‘하이 눈’에서 쿠퍼가 분(扮)한 보안관 윌 케인은 결혼하기 위해 은퇴하고 마을을 떠나려는 순간 자신이 감옥에 보낸 악당이 마을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꿔 마을에 남아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인다. 케인 보안관은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표상이다. ‘하이 눈’을 보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아베처럼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다. 케인 보안관이라면 말로만 무라야마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끝까지 사죄하지 않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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