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대선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11월 20일경 김대중 후보가 전화를 걸어 왔다.
“정동영 대변인이 누구를 데리고 갈 테니 면담을 한 뒤 운동본부에서 일하도록 해 주시오.”
정동영이 웬 신사를 데리고 왔다. 이름은 김재록. 한나라당 이한동 의원의 정치특보 출신이라고 했다.
“뭐 하던 사람인가요?”
“저도 오늘 아침 총재에게 이야기 듣고 처음 얼굴을 봤습니다.”
그날 김재록과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회계 분야에 정통하고, 영어도 잘한다고 했다. 학벌은 밝히지 않아서 묻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캠프에서 이의가 제기되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니 통제구역인 사무실에는 들이지 말고 본부장실 소파에서 같이 지내면 좋겠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출근하면 나의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보고서들을 보다가 때가 되면 나와 같이 밥 먹으러 나가곤 했다.
선거를 열흘쯤 앞둔 날,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 와서 무위도식하고 있는데 본부장께서 특별히 잘해 주시니 저도 한 건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박찬종을 이인제에게 확실하게 붙여 놓겠습니다.”
이인제 후보는 반짝 인기로 이회창 후보를 능가하였다가 약간 주춤한 상태였다. 자칫 이인제가 후보를 사퇴하면 이회창이 유리해지고 김대중 당선이 무망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인제 캠프가 끝까지 완주하는 게 우리에게는 유리했다. 그러나 나는 김재록의 말이 미덥지 않았다.
“박찬종은 야심가인데 과연 움직일까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저와는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저녁 무렵 호기롭게 사무실을 나갔다. 박찬종이 당시 숙소로 쓰고 있던 ‘돈암장’으로 간다고 했다.
오후 10시가 다 되어 전화가 걸려 왔다.
“이 의원님! 끝났어요. 확실하게 됐습니다. 내일 기자회견이 있을 겁니다.”
내가 미처 되묻기도 전에 그는 “내일 뵙고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박찬종은 이인제의 국민신당 사무실에 나타나 전격적으로 입당을 발표했다.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박찬종 전 한나라당 고문이 8일 입당 회견을 가진 국민신당 당사에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조순 전 민주당 총재와의 연대가 불발된 이후 세 부족을 절감해 왔던 신당으로서는 백만 원군을 얻었다는 분위기였다.’
대선이 끝난 후 김재록은 안건회계법인의 일원이 됐고, 김대중 정부의 실세를 자임하며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단연 이름을 날렸다.
기억에 남는 또 한 사람은 일본 이름으로 마쓰오카(松岡), 박준홍 회장이다. 도쿄 한국대사관 부근의 큰 빌딩 꼭대기 층 전체를 사무실로 쓰고 있는, 일본 증권시장의 ‘큰손’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미스터리 인물’이었지만 돈의 위력 덕인지 도쿄를 찾는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그를 만나려고 했다.
하여튼 그는 민주당을 지지하고, 특히 김대중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의 부친은 구 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출신으로 시발택시 미터기를 개발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후에 안동선 의원에게 확인하니 사실이었다. 안 의원은 그의 부친 밑에서 정치를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10월인가, 도쿄 가는 길에 그의 초청을 받아 저녁을 함께 했다.
“저는 대대로 민주당 지지 가문에서 성장했습니다. 도쿄에 오면 제가 박찬종 선배도 만나고, 정대철 선배도 만나서 저의 생각을 말해 줍니다. 이번엔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백만 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보 세계를 잘 아는 나는 우선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고, 섣불리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11월 말 박준홍이 서울에 왔다고 연락이 왔다. 그가 묵고 있는 플라자호텔에 갔다.
“약속한 대로 김대중 후보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한편 반가우면서도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도쿄의 사업은 어떻게 하고요?”
“모두 정리했습니다. 투자를 잘못해서 사업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다가 미국에 갈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김대중 후보 돕는 일을 하겠습니다. 의원님이 할 일을 찾아 주십시오.”
나는 그에게 정치자금 문제는 일절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우리 사무실에 한국의 증권가 사정을 잘 아는 분을 한 분 모셔 놓았는데 잘됐습니다. 그분과 같이 지내면서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 문제에 대하여 조언해 주시지요.”
나는 김재록과 같이 붙여 놓으면 둘이서 무엇인가 생산해 낼 것이라 믿었다. 다음 날부터 나의 사무실은 시끄러웠다. 두 사람이 천하를 주무르는 것처럼 괴짜 아이디어가 난무하였다. 운동본부의 일꾼들은 그들이 통제구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면서도 토론 내용을 경청하였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요청을 한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정부는 물론이고 여야 모두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외국의 은행이나 투자가들이 몰려오면 국내 경제는 그들의 사냥터가 되어서 아마 여러 은행이 거덜 나게 될 겁니다.”
박준홍은 선거운동 내내 정책 대안과 민심 동향, 그리고 홍보 방향에 대하여 가장 현실적인 바탕에서 우리에게 실용적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역시 그는 시장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 세브란스 검진 비밀리 준비… ‘DJ건강 공세’ 차단 일등공신 ▼
또 하나의 TF, 김중권-이강래의 마포팀
DJ는 이종찬의 태스크포스 외에, 김중권에게도 ‘외곽 팀’을 하나 만들도록 했다. 공식적으로는 김대중 후보 대선전략자문회의였지만, 당시 마포가든호텔에 방을 얻어 활동했기 때문에 다들 ‘마포팀’이라고 불렀다.
김중권이 자문회의 의장이었고, 태스크포스팀장인 이종찬과 당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 박상천 원내총무, 정동영 대변인 등을 수시로 만나 대책을 강구하라는 게 DJ의 당부였다. 뒤늦게 합류한 영남 출신의 김중권을 배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DJ는 이종찬에게도 그렇게 당부했다. 이종찬과 김중권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이종찬이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김중권이 사무차장을 맡아 함께 ‘동해 재선거’(1989년)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었다.
김중권은 ‘DJ 진영 선임자’인 이종찬에게 실무자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종찬의 기억. “나는 주저 없이 이강래를 추천했다. 사실 대선 초기에 우리 태스크포스의 주장이 이강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동교동 직계들이 이강래를 끌어내리고 대신 배기선을 추천했다. 한참 선거대책을 기획하고 있는 주무 참모를 바꾼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강래에 대하여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김중권-이강래 팀은 호흡이 잘 맞았다. 특히 선거 막바지 한나라당이 집요하게 DJ의 건강 문제를 물고 늘어졌을 때 ‘준비된 카드’로 이를 막아낸 게 바로 마포팀의 이강래였다.
사실 DJ의 건강 문제는 이종찬도 좀 찜찜해하던 이슈였다. DJ도 검진을 주저했다. 그러나 이강래는 “권위 있는 병원에서 비밀리에 건강검진을 받아놓자”고 주장했다.
이강래는 연세대 의대 김한중 교수에게 부탁했다. 단도직입적인 부탁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때였고, 민감한 주제였다. 의사들이 잘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강래는 설득을 멈추지 않았고, 김한중 교수의 도움으로 연세대 의대 학장을 지낸 허갑범 교수, 내과학교실의 이현철 교수 등이 나섰다.
DJ의 건강 문제를 놓고 네거티브 캠페인을 벌이던 한나라당은 급기야 ‘김대중 후보의 건강고백을 촉구하는 7개항의 질의서’까지 발표했다. 김중권-이강래의 마포팀은 바로 다음 날 ‘세브란스표 건강검진서’를 공개했다. 그래도 한나라당은 멈추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사 출신 의원들이 나서 DJ 진영이 공개한 소견서는 세브란스병원의 공식 문서로 볼 수 없다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 또한 헛발질이었다.
연세대 의료원 홍보과장은 즉각 한나라당 의사 출신 의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실 DJ의 건강 공방은 1997년 선거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DJ는 연세대에 고마워했다. 연세대와 아무런 인연도, 관계도 없는 DJ가 ‘김대중 도서관’을 연세대에 기부한 것도 그런 고마움 때문이었다.
여하튼 동교동에 밀려났던 이강래는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이종찬의 안기부에서 잠깐 기조실장을 맡은 다음에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김중권대통령비서실장과 다시 호흡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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