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왼쪽)와 신임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가 10일 국회 새누리당 원내대표실에서 상견례를 겸해 처음으로 회동했다. 이날 두 원내대표는 원내수석부대표 등을 대동하고 4시간 동안 마라톤협상을 벌였지만 공무원연금 개혁안 등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두 원내대표의 시선이 현재 경색된 여야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묘안이 있다. ‘소득대체율 50%’를 국회 규칙 별첨 부속서류에 넣자.”(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
6일 낮 12시.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와 새정치연합 우윤근 원내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일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국회 본회의 개최를 2시간 앞두고 여야 원내대표가 비밀리에 긴급 회동을 한 것이다. 이날 할 예정이었던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를 위한 묘안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새정치연합은 7일 새 원내대표 선출이 예정돼 있었다. 우 원내대표는 임기 마지막 날까지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와 최종 담판을 벌였지만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고 한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명기를 놓고 여야가 대립하면서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 원내대표의 제안에 유 원내대표는 “한번 생각해 보자”며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앞서 여당은 국회 규칙과 부칙에 50%를 명기하자던 야당의 제안을 거절한 상태였다. 우 원내대표의 제안대로 별지에 50%를 명기했을 경우 법적 효력이 어떻게 되는지, 새누리당 최고위의 추인을 받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판단한 유 원내대표는 “각자 (당으로) 가서 더 논의해 보자”고 말했다.
이후 밤늦게까지 두 원내대표는 수십 건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고 통화를 하고 따로 만났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반년 넘게 이어온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결국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교섭단체 대표의원으로서 여야 간 원내 협상의 최종 책임을 맡은 이가 각 당의 원내대표다. 이들의 협상에 따라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거의 모든 정책의 향배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왕적 입법권’이라고 할 정도로 막강해진 의회정치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원내대표의 세계와 그 협상의 미학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원내대표라는 자리
원내대표는 여야를 대표해 최전선에서 당의 이익을 위해 싸우면서도 동고동락하는 존재다. 전국 시도당에 소속된 당원들을 대표하는 당 대표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의회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 입법권이라는 점에서 소속 당 국회의원의 위임을 받아 여야 간 협상을 진두지휘하고 의사일정에 합의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원내대표의 권한은 막강하다.
과거에는 원내총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2003년 민주당에서 분당한 열린우리당이 ‘정책정당과 탈권위주의 지향’을 내세우며 처음으로 원내총무를 없애고 원내대표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김근태 전 의원이 최초의 ‘원내대표’가 됐고, 이후 2004년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등 다른 정당들도 하나둘씩 원내대표로 명칭을 바꿨다.
‘총무’에서 ‘대표’로 명칭이 바뀌면서 위상도 대폭 강화돼 당 사무총장을 밀어내고 당내 서열 2위로 자리매김했다.
여야 중진이면 누구나 한번쯤 임기 1년의 원내대표를 꿈꾼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내대표에 선출되면 언론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야당 원내총무를 5차례나 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최종 목표인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고 당 대표나 국회의장을 지낸 지도자급 정치인은 대부분 원내대표 경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막중한 권한만큼 책임도 만만치 않다. 여야 간 협상이 어그러지면 당장 책임론이 쏟아지고, 사안에 따라서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정치생명을 위협받기도 한다. 국회 운영을 둘러싸고 당 지도부나 청와대와의 마찰과 갈등, 원내 전략 부재 등으로 소속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여론의 즉각적인 비판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위기 맞은 유승민-이종걸 체제
여야가 풀어나가야 할 현안 리스크가 길어지면서 협상의 사령탑인 원내대표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협상의 물꼬를 틀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의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해 보인다. 이 원내대표는 “유 원내대표가 (협상의) 파트너로서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직격탄을 날렸고, 유 원내대표도 이 발언에 대해 상당히 감정이 상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7일 이 원내대표가 신임 야당 원내사령탑으로 선출된 이후 열흘 가까이 지났지만 여야 간 협상은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유 원내대표와 이 원내대표가 한자리에 앉은 것은 10일 이 원내대표 취임 인사를 겸한 4시간 동안의 만남이 유일하고, 원내지도부 사이의 물밑 접촉 움직임도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있다.
야당이 50% 명기가 관철되지 않으면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60여 건의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국회는 또다시 ‘식물국회’ 상태에 빠졌다. 여야는 부랴부랴 5월 임시국회에 합의했지만 12일 열린 본회의에서도 ‘급한 불’인 연말정산 환급분 처리를 위한 소득세법 개정안 등 3개 법안만 처리한 채 산회했다. 여야 간 대화는 사실상 단절된 상태이고 이른바 ‘냉각기’도 길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수시로 격의 없이 상대방 사무실을 찾았고 전화 통화도 자주 했던 전임 원내대표들과 달리 현 원내대표들은 최근 들어 전화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 원내대표는 14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 원내대표와 연락을 취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연락하지 못하고 있다. 제가 연락을 당장 할 이유가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두 원내대표 사이에 심각한 냉기가 흐르면서 양당은 물론이고 두 원내대표 모두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는 취임 100일을 넘겼지만 공무원연금 개혁의 목표시한 내 처리가 무산되며 당 안팎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새정치연합 이종걸 원내대표 역시 취임과 동시에 공무원연금 개혁 뒤처리 및 당내 분열 봉합이라는 난제를 떠안은 상태다. 여야 ‘협상 달인’의 조언
성공적인 여야 관계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우윤근 전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원내대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과 신뢰”라고 강조했다. 그는 “상대 당 원내대표는 물론이고 소속 당 국회의원들과도 끊임없이 소통하고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며 “상대를 속이면 한 번은 내가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한번 신뢰를 잃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협상은 물론이고 협상 결과를 같은 당 국회의원들로부터 추인받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안에서 협상 전문가로 꼽히는 김재원 전 원내수석부대표는 원내 협상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나에게 덜 필요한 것은 내주면서 궁극적으로는 서로 간의 뜻을 함께 관철해 가는 과정”으로 규정했다. 김 의원은 “야당은 여당을 공격할 수밖에 없고 여당은 성과를 내지 않으면 국정이 올스톱된다”며 “끊임없이 참고 인내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임 원내지도부에서 김재원 의원의 협상 파트너였던 새정치연합 안규백 의원은 “물은 본질이 바뀌지 않지만 그릇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뀐다”며 “협상도 물과 같이 그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의 요구에 따라 그 형태를 바꿀 수 있어야 하고 신뢰와 소통을 통해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의 또 다른 ‘협상의 달인’으로 불리는 박기춘 전 원내대표는 협상의 세 가지 비결로 파트너끼리 △자주 만나고 △신뢰를 쌓고 △칭찬과 사과에 인색하지 마라 등을 꼽았다. 박 의원은 공무원연금 개혁과 공적연금 개혁 논의로 얼어붙고 있는 여야에 대해 “당리당략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양보할 건 시원하게 양보해야 된다”며 “여야는 꼭 남북 관계처럼 적대적일 때도 많지만 공동 운명체라는 동반자 의식을 바탕으로 서로 믿고 신뢰하면 금방 풀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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