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목숨을 저당 잡히고 얻는 부패의 자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1일 03시 00분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이 자는 당의 신임을 저버리고….”

북한에선 제일 끔찍한 말이다. 장성택, 현영철을 포함해 숙청된 북한 간부들의 판결문에는 꼭 신임을 저버렸다는 ‘죄명’이 붙는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은이 너를 핵심 통치 계층에 뽑아주었는데, 이제 더 믿지 못하겠으니 죽이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것이다.”

통치 계층의 상위로 올라가는 사다리엔 조상 때부터 김씨 일가에 충성한 ‘뼈대 있는’ 집안 출신만 매달릴 수 있다. 경쟁자를 물리치며 한발 한발 위로 올라갈수록 꼽기조차 아름찬 갖가지 특혜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급 주택, 외제 차, 자녀 대학 입학권, 최고 의료 수급권부터 시작해 북한 돈 1원으로 1달러짜리 상품도 살 수 있는 특권까지….

자신이 어디쯤 올라왔는지는 어떤 공급을 받는지를 보고도 가늠할 수 있다.

최상위 ‘1일 공급제도 대상’이 되면 식모가 주문한 각종 육류, 과일, 수산물 등이 매일 오전 6시 냉동차에 실려 집에 배달된다. 중앙당 비서, 내각 총리, 군단장 이상 군 장성, 각 도 책임비서 정도가 이에 해당된다. 그 아래 3일에 한 번 냉동차가 오는 ‘3일 공급제도 대상’이 있는데 노동당 과장, 내각 장관급이 해당된다. 항일빨치산 연고자, 남쪽에서 송환한 비전향 장기수도 이런 공급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북한의 계층별 공급 제도는 주 공급 대상, 월 공급 대상까지 매우 세분화됐고, 운명도 특권을 누리는 자와 뜯기기만 하는 자로 갈린다.

1990년대 중반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시기 1일, 3일 공급 대상들의 특권은 오히려 더 커졌다. 김정일은 백성이 아무리 많이 굶어 죽더라도 측근들은 절대 등 돌리지 않게 아낌없이 보상해야 한다는 독재 정권 유지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경제가 오랫동안 마비되다 보니 핵심 계층의 충성을 사던 김정일의 돈주머니도 점점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이 꺼낸 카드가 바로 ‘부패 허가’였다. 김정일은 직접적인 보상을 줄이는 대신 부패를 눈감아 줌으로써 특권층에 우월감과 보상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북한의 통치 계층은 큰 간부는 크게, 작은 간부는 작게 각자 인민을 수탈하며 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김정은 시대에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북한에서 부유함은 곧 권력과 비례하게 됐다. 북한판 태자당이라고 표현되는 북한 신흥 부자층에는 당정군을 가리지 않고, 핵심 고위계층의 자녀들이 부모 권력순으로 포진돼 있다.

부패는 한편으로는 김씨 집안이 쥔 칼자루이기도 하다.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은 부패로 몰아 죽이면 그만이다. 태자당의 운명도 부모의 용도가 끝나는 순간 함께 끝나는 것이다.

얼마 전 김원홍 보위사령관의 아들인 김철의 외화벌이 세력에 대해 내사가 있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김원홍이 무탈한 것으로 보면 여전히 그가 효용가치가 있다고 김정은이 판단한 듯하다. 목을 맡기고 사는 고위층은 “당의 신임을 저버렸다”는 무시무시한 판결을 받고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목숨 내놓고 충성하게 된다.

사실 이런 식의 통치 방식은 세계의 가난한 장기 독재 국가들에서 아주 보편적인 것이다. 결국 죽어가는 것은 북한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인민들뿐이다. 하지만 독재 국가에서 병들고 굶주려 나약해지고 위축된 인민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는 거의 없다. 고위층 역시 부패한 체제가 자기의 부를 담보해주기 때문에 배신할 생각을 갖지 않는다.

결국 북한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세력은 몹시 궁핍하거나 몹시 윤택한 계층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시장에서 돈을 축적하는 시장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김정은 체제 들어 시행되는 시장 및 농업 개혁으로 이들의 만족도는 커지고 있다. 이들 역시 부패의 사슬 속에서 통치 계층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부를 키우고 있다. 이런 북한에선 오랫동안 시민혁명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전만 하더라도 북한의 부패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수위를 다툴 정도다. 나는 북에서 그 변질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북한이 뇌물 없이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어딜 가나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나라가 되기까진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되돌리자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청렴한 북한은 내 생전엔 볼 수 없을 것 같다. 정권 유지를 위해 북한을 완전히 썩게 만든 것, 이는 김씨 일가가 민족 앞에 용서받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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