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며 피 토하듯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읽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다. 진정 대인배의 풍모다.”
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 추도식에서 아들 건호 씨(42)는 이렇게 비꼬았다. 연단 아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두고 한 말이다. 이날 행사 말미에 유족 대표로 연단에 오른 건호 씨가 공격적 발언을 쏟아내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건호 씨는 A4용지에 미리 적어온 글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는 “권력으로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것도 모자라 국가 기밀문서를 뜯어 선거판에서 읽고 아무 말도 없이 언론에 흘리고 나타나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관중석에서는 건호 씨가 한 문장 한 문장 읽기를 마칠 때마다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종이를 꼭 쥔 건호 씨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혹시 내년 총선에선 노무현 타령, 종북 타령 안 할까 기대하지만 그저 헛꿈이 아닌가 싶다”면서 “사과, 반성 필요 없다. 제발 나라 생각 좀 하시라.” 김 대표는 쓴웃음을 짓다가 눈을 감았다.
건호 씨의 직격탄은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12월 14일 김 대표의 부산 합동유세 발언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당시 김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앞에서 ‘북핵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등의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준비한 글을 다 읽은 건호 씨의 모습은 결의에 차 보였다. 마치 ‘꼭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 노건호, 권양숙 여사 만류에도 김무성 맹공
건호 씨는 추도식 전날 가족, 이해찬 의원 등과 함께 제사를 지낸 뒤 “김 대표에게 내가 한마디 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를 들은 권양숙 여사는 “손님에게 예의가 아니다”라며 말렸지만 건호 씨는 뜻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친노(친노무현) 진영의 한 의원은 “노 씨가 추도식 당일 오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인사말을 썼다”고 전했다.
건호 씨가 공개 석상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내에선 문재인 대표가 4·29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뒤 청와대와 여당에 주도권을 뺏긴 현 정국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한 당직자는 “친노 측이 야권의 최대 행사 중 하나인 노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아들 건호 씨의 입을 빌려 문 대표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문 대표 측은 “중국 유학 중인 노 씨가 22일 귀국했기 때문에 문 대표와 사전 협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건호 씨는 2002년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LG전자에 입사했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LG전자 미국, 중국 법인 등에서 일하다 2013년 LG전자에서 휴직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건호 씨는 그해 9월부터 중국 베이징대에서 국제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김무성 나가라”…비노에도 야유
이날 추모객들은 “김무성은 나가라”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고 비난했다. 노 전 대통령의 묘역에 헌화한 뒤 물세례를 받기도 한 김 대표는 유족들과 간단한 목례만 한 뒤 굳은 표정으로 봉하마을을 떠났다.
추모객들은 최근 친노 진영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비노(비노무현) 중진에게도 야유를 퍼부었다. 친노 패권주의 청산을 주장한 김한길 의원에게는 생수병을 던지며 “한길이가 한길로 가야지. 너만 살려고 그러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정치연합을 탈당한 천정배 의원을 두고도 “원조 친노 천정배 뭐하는 거냐”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김 의원은 24일 페이스북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욕하고 삿대질해대서야 되겠는가”라고 비판했다.
○ 文 “노무현 이름 앞에서 분열, 부끄럽다”
문 대표는 23일 추도식 직후 기자들과 만나 “정권교체를 하지 못한 것도 통탄스러운데 다시 친노 비노로, 노무현의 이름을 앞에 두고 분열하는 모습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서 친노 진영 스스로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이 나온다. 친노 진영에서조차 여당과 비노 진영에 대한 분노가 오히려 분열을 키우고 있는 데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친노의 한 재선 의원은 “노 씨의 발언들이 추도식 분위기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 것 같다”며 “예상치 못한 격한 발언에 나도 많이 당황했다”고 말했다. 한 당직자는 “노 씨가 비아냥거리는 말투 대신 정중하게 김 대표의 사과를 요구했어도 전달하고자 한 의미는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라며 “대립과 분열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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