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 5일 나는 안기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6년 만에 다시 국가정보기관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수장으로 왔다. 한편 감개무량했고, 또 한편으로 ‘내가 다시 온 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정보부 개혁을 도모했다. 10·26 직후 이희성 부장서리 때도 정보부의 개혁을 열망했지만 이 부장서리는 12·12사태로 경질되었다.
전두환 부장서리는 내가 늘 주장해 온 “(팔레비 정권 시절 이란의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사드(MOSSAD)가 돼야 한다”는 뜻을 선뜻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역시 광주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그 직후 본인이 스스로 국가보위상임위원장을 겸직하면서 중도에 좌절되었다.
나는 부장으로 취임하면서 부훈(部訓)부터 바꾸었다. 1961년부터 지켜온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란 부훈은 김종필 초대 부장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DJ(김대중)가 가장 싫어한 말이 ‘음지’였다. DJ는 나에게 “음지란 정보기관의 음산한 배후를 나타내는 말이어서 듣기만 해도 오싹하다”고 했다.
정보이론의 대가인 셔먼 켄트는 “정보란 지식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켄트를 원용하여 ‘정보는 곧 국력이다’란 작명이 이루어졌다. 최종 결재 단계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곧’자를 빼고 ‘정보는 국력이다’라고 고쳤다.
나는 지금도 이 원훈을 가장 잘된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훈부터 바꾸었다. 김대중 대통령 때 만든 것이라고 무조건 없앴다. 그들이 바꾼 원훈을 보자.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언의 헌신’이라고 큰 돌에 새겨 놓았다. 언뜻 보면 국가정보기관이 아니라 철학자 양성소 같아 보인다.
내가 부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벌써 안기부 내부에서 살생부가 만들어졌다. 당의 인맥을 통하여 그 사본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그 문서를 보자마자 그동안 소외되었던 호남 출신 간부가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살생부는 그 작성 과정을 생각하면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정보기관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차단’에 있다. 각 부서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 정보기관의 수칙 1호다. 선진국 정보기관의 곳곳에는 ‘귀하는 알 필요가 있는 것만 알라(You only know to need to know)’라는 경고가 나붙어 있다. 그런데 이 살생부는 각 부서에서 벌어진 일들을 종합하고, 그 가운데서 부적절한 대상자를 골라낸 흔적이 뚜렷했다. 차단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는 누가, 어떤 과정에서 만들었는지 은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나는 그 주모자를 기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살생부를 파기했다.
안기부가 이처럼 타락한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공정한 인사밖에 없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당에 신임 인사차 갔을 때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 근접경호팀 팀장이었던 이영재 동지가 부탁을 했다.
“이제 어른이 청와대로 갔고, 경호업무는 경호실에서 담당하니 우리는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우리 팀이 안기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아직 부내 사정을 잘 모릅니다.” 일단 답을 미루어 두었다. 나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산악회와 나라사랑운동본부(나사본) 같은 사조직 사람들을 특채하여 부내 인사를 엉망으로 망친 전례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이렇게 답을 줬다.
“안기부 개혁을 위해 많은 부원들을 구조조정하고 있는데 외부에서 새로 부원을 데리고 들어오면 큰 불만이 생기게 될 겁니다. 내가 다른 곳에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지요.”
또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이 찾아왔다. 그의 말은 참으로 거절하기 어려웠다.
“원장님 소신대로 일하시는데 제가 청탁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대선 직전에 강제 퇴직당한 김홍석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남 광양 출신인데 안기부 공채시험에서 1등으로 입사한 우수한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 안기부에서 용공 조작하는 정황을 포착하고 항변하다가 감찰실에 끌려가 감금당하고 결국 사표가 수리되었습니다. 억울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그를 복직시켜 주십사 요청드립니다.”
나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가 우수한 직원이란 사실은 틀림없었다. 그는 대선 직전 안기부 내 비밀이 담긴 소위 ‘K파일’을 갖고 나가 함세웅 신부에게 신변보호를 부탁했다. 그러다 대선 직전 감찰실 직원에게 연행된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그를 복직시킨다는 것은 인사 원칙에 배치됐다. 나는 총무국장에게 본인을 면담하여 재취업을 권고해 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김 의원과 함 신부만 믿고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퇴임한 이후 그는 즉각 재임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직급 승진까지 했다.
직원들 사이에 “어제는 ‘철’자가 세더니 오늘은 ‘홍’자가 세구나” 하는 말이 돌았다. 이런 인사가 김대중 정부 시대 국정원 문란의 단초가 되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 DJ “이제 선거 안해도 되니 좋지요?” ▼
이종찬, 서울시장 출마 접고 안기부장으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가 끝난 뒤, 이종찬은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준비했다. 부인 윤장순 씨가 반대했지만, 일단 일을 저지르면 따라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의도 대하빌딩 김영도 회장에게 사무실까지 부탁했다. 3월 2일 김중권 대통령비서실장 내외가 이종찬 부부를 초청해 점심을 샀다. 여러 가지 잡담이 오간 후에 김중권이 넌지시 물었다.
“이 선배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쎄, 생각 중인데 대통령님의 의사는 어떨지….”
“특별히 말씀은 없었는데 서울시장 출마하시면 어떻겠어요?”
“나도 고려해 보는 중입니다.”
그런데 윤 여사가 불쑥 나섰다.
“아! 그 지긋지긋한 선거를 또 해야 돼요?”
김중권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고생이 많으셨던 모양이지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주변에서도 그간 수고하신 것 알고 모두 도우려 할 겁니다.”
그런데 헤어질 무렵 윤 여사가 또다시 “우리 선거 그만두게 해 주세요!”라고 호소했다.
이틀 뒤, 이종찬은 KBS TV ‘명사들의 가정’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아내는 물론 가수 이선희도 함께 출연했다.
방송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김중권이 전화를 했다. “안기부장으로 결정됐습니다.”
이종찬은 순간 당황했다. 마지막 인수위원회 보고 때 DJ가 안기부 상황을 묻긴 했다. 누가 안기부장이 되어야 개혁이 가능하겠느냐고도 물었다. 그때 이종찬은 조승형 헌법재판관을 추천했다. 오래전부터 해 온 생각이고, DJ와 그런 대화를 나눈 뒤 조승형을 찾아가 귀띔까지 했다.
그날 오후 5시 30분 청와대에서 이종찬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임명장 수여식이 열렸다. “윤 여사! 이제 선거 안 치르게 되어 좋지요?”
DJ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종찬은 ‘아, 김중권에게서 상세히 보고받고 결정한 인사구나!’라고 생각했다.
“차장은 누가 좋겠는지 말해 보시오.”
이종찬은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선거 때 ‘노랑봉투’에 정보를 넣어 DJ에게 몰래 보고하던 차장이 있었다는 사실만 머리를 스쳤다.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갑자기 말씀하셔서 우선 생각나는 대로 건의 드립니다. 국제 담당은 라종일 박사가 전문가입니다.”
“좋아요 그렇게 하시오. 다음 국내 차장은?”
“신건 전 법무부 차관을 건의드립니다.”
“아, 좋지. 그렇게 하시오. 또 다음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리가 정보 예산을 총괄하는 기획조정실장입니다. 거기엔 이강래 군을 보내주십시오.”
“잘됐어. 이 군을 어디로 보낼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좋은 의견이오.”
옆에 있던 김중권이 의외라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이종찬은 그날 밤늦게 조승형을 만났다. 김상현 의원도 있었다. 조승형은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지만 나는 적절치 않아요. 오히려 이 의원이 맡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나를 시키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이종찬은 조승형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조승형은 김홍일의 국회 진출을 반대해 이미 오래전에 DJ의 눈 밖에 나 있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