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나와 고교 동창이다. 대구 피란시절이나 재학시절부터 우리는 비교적 가깝게 지냈다.
나는 정치를 시작한 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선거 같은 대사를 치를 때는 듬뿍 지원을 받았지만 평소엔 절대로 받지 않았다. 건전한 우정을 유지해야지, 자칫 재벌의 심부름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 나름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1992년 대선 과정에서 김우중과 서먹하게 결별한 이후 나는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내가 김우중을 다시 만난 것은 국가정보원장이 되고 난 이후였다. 그는 당시 경기고등학교 동창회장으로 선출되어 몇몇 유력 동창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나 나는 피란시절부터 쌓아온 우정을 금가게 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대우에 대하여 좋지 않은 보고가 계속 올라왔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측에서 김우중의 언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정보였다.
1998년 3월 김우중이 불쑥 ‘500억 달러 흑자 달성’이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는 물론 재계에서도 깜짝 놀랐다. “아니 당장 100억 달러가 없어서 IMF에 손 벌리느라 이 고생을 했는데 500억 달러 흑자라니?” 하지만 제일 먼저 회심의 미소로 반긴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나는 김우중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 봤다.
“김 회장! 진짜 가능한 거야?”
“왜 정부 사람들은 모두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는 거야. 불쑥 꺼낸 말 아니란 말이야. 생각해 보라고, 매년 우리 기업들이 리노베이션 하느라 자재들을 엄청 많이 들여왔네. 그런데 금년에는 모든 기업들이 외화가 부족해서 수입을 중지했어. 그러니까 수입은 줄고, 수출은 늘게 되지 않나? 벌써 상반기에 200억 달러 흑자가 될 전망이야. 내가 큰소리치는 게 아니라고! 하반기에 페달을 좀 더 세게 밟으려면 수출금융이나 해주면 되는데, 정부 사람들 알아듣게 자네가 나서서 설득 좀 잘 해주게.”
그렇지만 ‘정부 사람들’은 김우중의 500억 달러 흑자 발언을 별로 반기는 것 같지 않았다. 김우중이 옛날식으로 수출금융 따먹기를 위해 수를 쓰는 거라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그해 연말 결산을 해 보니 399억 달러 흑자를 냈다. 1997년 84억 달러 적자에 비하면 흑자를 낸 것 자체가 대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부터 “수입이 35.5%(514억 달러)나 대폭 줄어서 얻어진 결과”라며 냉담해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우중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점점 심각하게 돌아갔다.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믿고 구조조정에 전혀 협조하지 않는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왔다. 직분에 맞지 않지만 참다못해 그에게 충고했다.
“세계 경영을 하려면 집안 단속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 대우는 구조조정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네!”
그는 펄쩍 뛰었다.
“구조조정 누가 소홀히 하겠나? 그런데 누가 사가야지, 내놓아도 사갈 사람이 없는걸. 그렇다고 싸게 팔면 국가에 이익이 될 것 없지 않은가? 이게 다 IMF 뒤에 숨은 외국 자본의 장난이야!”
그는 상기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 표정에는 ‘너도 나를 못 믿는 거야?’라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그렇지만 내친김에 한마디 더 했다.
“김 회장! 나는 자네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김 대통령이 반대급부로 무엇을 해주리라 기대하진 말게. 과거 박정희나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부처 장관들 불러서 ‘대우가 망하면 한국경제가 흔들려. 그러니 대우를 봐줘야 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었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그럴 만한 배포도 없고, 또 그런 식의 기업 살리기가 잘못되었다고 지금까지 비판해온 사람이네. 저서에도 분명하게 씌어 있고 말일세.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자기가 한 말을 뒤집겠나? 그가 대통령의 권한으로 보호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안 하는 게 좋을걸세.”
그러나 그 후 김우중의 행동을 보면 내 말을 충고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과거 3공 5공 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1999년 4월 20일 김우중이 나에게 전화를 해왔다.
“나 우중인데, 부탁 하나 하자. 이헌재가 나를 만나주지 않고 피하는데, 너 헌재 좀 불러내주라.”
“헌재가 피한다면 이유가 있겠지. 어떻게 그가 ‘빅 브러더’인 김 회장을 피하겠나?”
“농담 말고, 내일 아침 조찬이라도 함께하도록 불러주게.”
고민 끝에 금융감독원장인 이헌재에게 전화를 걸어 롯데호텔에서 아침을 같이 하자고 했다. 일부러 국정원 안가를 피한 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만남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아침 이헌재는 방으로 들어서다 김우중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거들었다.
“이 원장, 김 회장을 피할 필요는 없고 정확한 실정을 들어봅시다.”
김우중은 서류를 꺼내서 무엇인가 빠른 어투로 설명했다. 나는 그 사정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지만, 알 필요도 없어서 밥만 열심히 먹었다. 다만 이헌재의 절규는 기억난다.
“회장님, 제가 어떻게 회장님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죽더라도 회장님의 청을 들어주고 문제가 해결된다면 제가 죽겠습니다. 그러나 회장님이 말한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저도 죽고, 회장님도 죽습니다!”
이헌재는 획 방을 나가 버렸다.
“김 회장, 너무 늦었어! 내가 작년에 말하지 않았나? 김대중 시대는 다르다고 말이야.” ▼ 물음표로 남은 ‘김우중-조풍언 4430만달러’ ▼
‘실세’ 조풍언의 대우 회생 로비의혹
김우중은 1999년 10월 해외로 나간다. ‘세계 유랑’의 시작이었다. 그해 5월 이종찬도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을 마치고 새로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이었다. 조풍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숨은 실세’로 통하던 재미사업가 조풍언은 이종찬과 김우중의 경기고 2년 후배였다.
“형님, 청와대 이기호 수석을 만나자고 했는데 같이 갑시다.”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아니 옆에만 계세요. 내가 좀 따져 물을 게 있습니다. 저 혼자 듣는 것보다 형님이 계시면 분위기가 좀 달라지지 않겠어요?”
이종찬의 기억. “조풍언은 이기호에게 실제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김우중에게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내가 필요했던 것 같다.”
세 사람은 8월 17일 조풍언이 예약해놓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메트로폴리탄에서 만났다. 조풍언은 원래 말재주가 없었다.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설명하는 도중 이기호가 짜증을 내듯이 말했다.
“여러 설명 하시는데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대우의 워크아웃이 그나마 김우중 회장이 사는 길입니다.”
조풍언이 “워크아웃이 어떻게 사는 길이 되나요?”라고 하자 이기호는 “법정관리는 더 가혹합니다. 워크아웃으로 가야 대우자동차라도 건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대우 회생을 위한 조풍언의 로비 의혹은 아직도 ‘미제’나 마찬가지다. 김우중이 조풍언에게 준 4430만 달러가 로비자금인지, 로비자금이라면 실제로 그렇게 쓰였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김우중이 조풍언의 ‘로비력’에 기대를 가진 건 분명했다. 조풍언의 부친과 DJ는 6·25전쟁 당시 전남 목포 지역의 ‘기관장’이었다. 조풍언의 부친은 향토예비군 같은 조직의 장이었고, DJ는 전남지역 해상방위대 부대장이었다.
그런데…,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조풍언을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조풍언이 (김대중) 총재한테 처음 인사할 때 한번 봤을 뿐 그 이후엔 차 한잔 같이 한 적이 없다.”
보기 드문 경우다. 그러니까 권노갑의 말은, 조풍언이라는 사람이 ‘권노갑을 건너뛰어 DJ와 직거래가 가능한 인물’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DJ가 아니면 그 가족과….
조풍언은 작년 10월 로스앤젤레스 인근 자택에서 7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메모 습관 때문인지 그 직후 잠깐 ‘조풍언 비망록’에 대한 관심도 일었으나 금방 잊혀졌다. 많은 것이 그렇게 잊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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