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과 국회 권력의 ‘반대를 위한 반대’에 막히고 ‘독재자’ ‘원수’ 비방에 몰려
조급해진 나머지… 유승민 공개 비난 무리수
‘포용’과 ‘내 편 만들기’ 등 달라져야 반전 가능하다
국회와 정치권을 맹비난한 박근혜 대통령의 ‘6·25발언’을 듣고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옛 연설문이 문득 생각났다. “지금까지 야당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비방 중상 악담을 퍼부으며 오로지 반대만을 해왔습니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한다고 해서 나는 야당으로부터 ‘매국노’라는 욕을 들었습니다. 없는 나라에서 남의 나라 돈이라도 빌려와서 경제 건설을 서둘러보겠다는 나의 노력에 대해 야당은 ‘차관망국’이라고 비난했습니다.”(1969년 10월 10일 대국민 담화문)
5·16으로 정권을 잡은 지 8년, 민족의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이 막 보이기 시작하는데도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에 대해 울분과 한스러움이 연설문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는 “만약 야당의 반대에 못 이겨 이를 중단하거나 포기했더라면 과연 오늘 우리가 설 땅은 어디겠습니까”라며 격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6·25발언’도 기본 인식에서 아버지의 연설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정치와 국회가 국민들이 잘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정부와 정부 정책에 대해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 비판만을 거듭해 왔다”는 말은 그대로 옮겨온 듯하고 “진정 정부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경제 법안을 시행해 본 이후에 그런 비판을 받고 싶다”는 하소연도 비슷하다. 아버지 시대의 ‘야당’이란 말이 ‘국회’와 ‘정치’로 바뀌면서 범위가 커졌을 뿐이다.
40여 년의 격차가 있으나 부녀(父女) 대통령 앞에 야당 또는 국회라는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똑같다. 박정희 시대의 야당이 단기간에 민주화를 성취한 세력이었다면 현재의 국회는 ‘제왕적’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러울 정도로 권력이 비대해진 데다 국회 이기주의 앞에선 여야가 똘똘 뭉쳐 있는 상태다. 아버지가 ‘독재자’라는 손가락질을 수시로 받았던 반면, 딸은 야당으로부터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원수’ ‘그 ×’에다 심지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악담을 들어야 했다. 통치 여건에서 빼닮은 정치적 운명이다.
다음 달이면 5년 임기의 반환점을 맞는 박근혜 대통령에겐 그동안 정치적 운이 따르지 않았다. 취임 첫해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지난해 세월호 사고, 올해 메르스 사태에 휩싸였다. 이제 그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여기는 듯하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목해 “국민을 대변하지 않고 자기의 정치철학을 펴고 있다”고 비난한 6·25발언에도 조급함이 담겨 있다. 같은 여권 울타리에 있는 특정 인사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박 대통령이 처음부터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자신의 뜻대로 사퇴 요구가 받아들여져도 부정적 이미지를 더할 뿐이고, 사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더 큰일이다.
유 원내대표가 올해 4월 국회에서 교섭단체 대표로서 했던 연설을 다시 들어 봤다. 조국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 찬사가 쏟아졌으나 박 대통령은 자기 정치를 한 것으로 판단했던 문제의 연설이다. 그는 이 연설 이후 대선주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한다.
교섭단체 연설은 소속 정당의 입장을 밝히는 자리이지만 그는 작정한 듯 개인의 정치적 포부와 철학을 길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꿈꾸는 보수’를 내세웠으나 이념적 지향은 모호했고,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의원님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구속하지 않겠다” “합의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등 비현실적이고 인기영합적 발언도 했다. 정부와 번번이 엇박자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 오직 국민과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일해 왔다”는 강직한 박 대통령과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살고 있는 시대는 박정희 시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이 점에서 아버지와는 다른 운명이다. 아버지의 한일 국교정상화나 차관 정책이 훗날 높은 평가를 받듯이 박 대통령이 실현을 열망하는 경제 정책들도 시간이 지나면 꼭 필요했다는 평가를 받을지 모른다. 그가 원하는 정치를 하고 목표를 이루려면 유 원내대표 같은 인사들도 포용하고, 야당 사람들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대통령이 바뀔 수밖에 없다. 남은 임기 2년 반은 너무 촉박한 시간일 수도, 충분한 시간일 수도 있다. 앞으로의 임기가 성공적이 될지는 박 대통령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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