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박근혜 대통령이냐 유승민 원내대표냐 선택의 시점이다. 안 되면 대통령 탈당이지 어떻게 하겠느냐.”
새누리당 유 전 원내대표의 사퇴 여부로 논란이 거셀 때 ‘친박(친박근혜) 핵심’ 의원은 심심찮게 이런 말을 했다. 유승민이 사퇴하지 않으면 박 대통령은 탈당할 것이며, 그런 상태에서 새누리당이 내년 총선을 치를 수 있겠느냐는 요지로 소속 의원들의 선택을 압박하는 얘기였다. 유승민이 사퇴한 지금, 친박들은 되레 박 대통령 의중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집권주체 세력의 허약한 실체만 노출한 꼴이 됐다.
설득·헌신 없는 친박 스타일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청와대의 지적 능력과 논리적 설명력, 담론의 생산·주도 능력이 지금처럼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꼬집었다. 여기서 ‘청와대’를 ‘친박’으로 바꾸어도 똑같은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친박들은 “박 대통령만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큰 분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식상한 찬미를 빼고는 도대체 이들이 왜 국회법 개정안은 위헌이며 통과돼서는 안 되는지, 경제활성화법은 왜 반드시 통과돼야 하는지에 관해 국민을 설득하고 야당 의원들을 이길 논리와 열정을 발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친박들은 박 대통령의 ‘6·25 국무회의 말폭탄’을 신호 삼아 유승민 끌어내리기에 나섰지만, 과거 한솥밥을 먹던 유승민을 만나 자진사퇴를 설득하는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앞서 위헌적인 국회법 개정안이 최고위원회의와 의원총회에 보고됐을 때도 친박들이 결사적으로 불가론을 펴며 가로막았다면 개정안의 국회 통과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통령과 그토록 가깝다는 정무특보 겸직 의원들은 당청이 어긋나는 동안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박 대통령이 53일째 공석인 정무수석비서관을 임명하지 못하는 데는 맡길 만한 후보감이 죄다 내년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두거나 역할을 할 자신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과 무관치 않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때 금배지를 떼고 정무수석을 맡았던 정진석, 김효재 전 의원 같은 ‘자기희생’은 없고 ‘자기정치’만 하는 게 ‘친박 스타일’이라면 박 대통령이 서글프지 않겠는가.
‘원조 친박’이었던 한선교 의원은 “우리만이 진짜 친박이라는 배타심이, 박(朴)이 아니라 오직 나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친박이 지금의 오그라든 친박을 만들었다”며 맹성을 촉구했다. 청와대에만 십상시가 있는 게 아니라 여의도에도 십상시가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지금 친박은 불통과 폐쇄성의 상징이다. 초·재선 강성 친박들인 이들 십상시는 대통령의 힘을 빌려 내년 총선 공천전쟁의 화근이 될 ‘K-Y(김무성 유승민)라인’의 한 축을 제거했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정파성, 속 좁음, 비민주성만 부각시키는 데 앞장선 셈이 됐다. 이들은 청와대 심중을 반영한다고 자임하지만 김무성 대표나 유 전 원내대표는 이들이 청와대를 팔아 ‘자기정치’를 하는 바람에 되레 소통에 장애가 된다고 본다. 불통대통령 만드는 게 不忠
리서치앤리서치와 데일리한국이 두 달 전 ‘어느 세력이 여권을 주도하는 게 바람직한가’를 물은 여론조사에서 ‘비박 그룹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과 ‘친박 그룹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응답이 각각 35.6% 대 32.6%로 팽팽했다. 민심을 내세운 비박, 당심을 내세운 친박 사이에서 친박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자명하다. 대통령만 앞세우며 닫힌 정당, 닫힌 정부를 만드는 패권주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미래가 어떨지는 ‘열린우리당’의 사례가 이미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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