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내국인 해킹 의혹사건은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를 원하는
이병호 원장의 첫 시험대
지긋지긋한 ‘전과’ 굴레 벗고 존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려면
불만스러워도,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의혹 해소해야
이 원장의 선택에 중간은 없다… 국정원 신뢰회복 여부
그의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해킹 의혹을 받다가 숨진 국정원 직원 임모 씨의 빈소를 찾아간 사진을 접하는 순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점이라 ‘몸보신’을 생각했을 법도 한데…. 나중에 이 원장이 ‘비록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그의 죽음은 한 인간의 비극이자 조직에 대한 충정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 밖에서는)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사태의 추이와 관계없이 그는 ‘조직의 보스’ 역할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의 판단은 이 원장의 몫이었지만, 밖에서 부는 바람은 그의 편이 아니다. 외풍의 발원지는 새정치민주연합이다. 내국인 사찰은 절대로 없었다는 임 씨의 유서도, 국정원의 해명도 소용없다. 사건이 불거졌을 때의 국민 정서를 고려하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결정적 한 방이 없는 공방을 보며 이제는 국정원에 대한 의혹 제기에도 ‘신사협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국정원발 국론 분열과 살라미식 공방은 졸업할 때가 됐다.
첫째, 국정원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때다. 국정원은 누구의 것인가. 대한민국과 국민의 것이다. 집권당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국정원은 집권당의 전리품이자, 야당의 공적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도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념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국정원을 5년간만 옹호하고, 5년간만 흠집 내는 것은 소아병적이다. 어느 정권이든 국정원을 국익 보호의 첨병으로 존중하고 잘 활용한 뒤 다음 정권에 넘겨줄 의무가 있다.
둘째, ‘국정원 전과’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 국정원은 그동안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서 야당은 이번에도 ‘셀프 해명, 셀프 면죄부’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제는 사실에 입각해서 잘못한 만큼만 책임을 추궁했으면 싶다. 전과자는 갱생의 대상이지, 이지메의 대상이 아니다. 지각을 했으면 반성문을 받고, 커닝을 했으면 정학을 시키고, 교사를 폭행했으면 퇴학 처분이 합리적이다. 징계 수준이 적정해야 갱생 의지도 살리고, 조직 기강도 세울 수 있다.
셋째, 문제를 제기하고 푸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국정원의 업무 속성을 존중해 가급적 드러나지 않게 문제를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 일만 터지면 칼로 째고 배 속을 들여다보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체력도 떨어지고 회복 시간도 길어진다. 내시경과 초음파 등으로 진단하고 약물이나 물리치료를 한 뒤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이 옳다.
넷째,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묻는 게 순리다. 사이버전쟁이라는 말이 나온 지도,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 테러 방지 등을 위해 감청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도 이미 오래다. 그런데도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은 10년 넘게 난공불락이다. 손발이 묶이다 보니 불법 탈법의 유혹에 빠진다. 합법적 감청, 철저한 감독, 위법에 대한 엄중한 처벌 쪽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
이런 주장은 이 원장도 원하는 바일 것이다. 이 원장이 국정원을 떠나 19년간의 야인 시절에 언론에 기고한 글들을 요약하면 ‘국정원도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되지만, 정치권도 국정원을 부당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정원 안팎에서 기른 이 원장의 리더십이 주목받는 이유다.
이 원장은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 내국인 해킹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국정원을 수렁에서 구하든가, 그게 아니면 본인이 공언한 대로 깨끗하게 물러나야 한다. 중간은 없다. 6일 여야당과 전문가들의 국정원 조사가 고비다. 숨김없이 설명해 “은폐가 더 무거운 범죄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이 원장은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한다지만, 이겨야 국정원이 산다. 야당은 계속해서 문제를 삼을 것이다. 그래도 끈질기게 소명해 결국은 의혹을 털어야 한다. 신뢰 회복만이 소신을 실천할 기회를 줄 것이고, 그게 이 원장의 소명이다.
야당이 국민을 대신해 진상을 규명하는 것도 존중한다. 국정원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저절로 수술대에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의 주장이 믿을 만하다면, 솔직하게 인정하는 여유를 보여줬으면 한다. 그렇게 한다면, 이번 사건은 야당과 국정원의 관계 설정에 기념비적 전환점이 될 것이다. 사실에 겸허한 야당은 지지 그룹으로부터 잠시 비난받을지는 모르나, 그런 야당의 존재는 국정원보다 훨씬 더 소중한 국가의 자산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