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방북한 5일 북한에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의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는 10일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당국 대화 의지가 없는 북한에 정부의 대화 제의를 이 여사 방북과 연관해 거부할 핑계를 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비무장지대(DMZ) 지뢰 폭발이 북한 소행으로 드러나자 정부는 당분간 대북 대화 동력을 찾기 어려워졌다고 보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에 8·15 전 남북관계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대북 제안 시점을 결정했다. 시점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는 5일 경원선 남측 구간 기공식 직후로 확정됐다. 북한이 중단을 요구하는 한미 연합 군사연습인 을지프리덤가디언이 17일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시간 차를 둔 것이다. 지난해 8월 남북 고위급 접촉을 제의하면서 회담 개최 시점을 을지프리덤가디언 시작 이후인 19일로 정했다가 북한이 반발한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기공식 직후로 잡은 이유는 기공식 전에 대북 제의를 했다가 거부당하면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박 대통령 기공식 대북 메시지가 퇴색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이 여사 방북이 기공식과 겹치자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대화 의지가 있다면 정부-민간이 동시에 대화 뜻을 밝혀 윈윈할 수도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정부는 5일 오전 11시 반 판문점 남북 연락관 직통전화를 통해 “홍용표 통일부 장관 명의로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앞으로 보내는 고위급 회담 제의를 담은 서한을 전하겠다. 오후 1시에 만나자”고 했다. 서한에는 한국이 원하는 이산가족 상봉, 광복 70주년 공동기념 행사 개최와 북한이 원하는 금강산 관광 재개 등 양측 관심사를 포괄적으로 논의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금강산 관광은 북한의 눈길을 끌 만한 유연한 제안. 관례에 따라 북한에 미리 의제를 알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북한 연락관은 이날 오후 1시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서한 접수를 거부했다. 10일까지 같은 답을 되풀이했다. 대화 거부의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남북관계에 대한 초보적 예의조차 없는 것으로 유감을 표한다”고 비판했다.
북측은 대화 제의 시점을 두고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 여사 측 관계자는 “방북 다음 날인 6일 맹경일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이 여사 방북 기간에 대화 제의가 온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안 받겠다고 했다”며 “첫날부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면담이 어렵다는 뉘앙스를 보였던 북측은 6일 면담을 못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했다”고 전했다. 통일부는 “이 여사 방북과 대화 제의는 연관관계가 전혀 없다”며 “북한이 자기들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애초 남북 대화에 나올 생각이 없었던 북한이 이 여사 방북을 연결해 남남(南南) 갈등을 일으키려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부는 ‘이 여사를 통해 대화 제의를 할 수 있었지 않느냐’는 지적에 “정부가 관여하는 것에 북한이 부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앞서 북한은 정부가 김대중평화센터를 통해 정부 관계자 1, 2명의 동행 의사를 묻자 “이 여사 일행에 왜 끼어서 오느냐”며 거부했다고 한다.
일각에선 4일 지뢰 폭발이 일어난 다음 날 대화를 제의한 데 대해 외교안보 부처 간 엇박자를 의심하기도 한다. 지뢰 폭발 이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는 “대화 제의 시점에는 북한의 관련성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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