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집권 전반기의 외교 노선은 ‘올바른 상대하고만 대화한다’는 원칙 외교였다. 일본에 대해서는 과거사 문제 선(先) 해결을, 북한에 대해서는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라는 태도를 고수해 왔다. 그러면서 남북 관계와 한일 관계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급속히 냉각됐다. 결과적으로 동북아 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국이 움직일 외교적 공간을 잃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박 대통령이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상대방의 뚜렷한 태도 변화가 없다는 국내 비판 여론을 감수하고도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언급한 것이나, 중국의 항일 전승절 행사 참석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이런 위기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과감하게 ‘실리 외교’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외교 관계에서 근본주의적 접근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며 “과거와 미래, 경제와 안보를 분리해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실리 외교 전환을 요구하는 주변 정세
‘원칙 외교’로는 지금의 동북아 질서를 유지하려는 미국(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동북아 질서를 바꾸려는 중국(신형대국관계론) 사이에서 다양하고 유연한 전략을 구사하기 어려웠다. 한일 관계가 틀어지면서 미국은 한국의 한미일 협력 강화 의지를 의심했다. 중국은 이때라고 판단해 한미일 협력 축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한국을 집중 공략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THAAD) 체계 설치부터 항일 전승절 참석까지 한국을 두고 중국과 미국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다. 원칙만 고집하는 외교는 중견국 외교를 펼치는 한국의 국력과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일본의 ‘실리 외교’는 치밀했다. 일본과 미국은 4월 28일 ‘미일 공동 비전 성명’을 발표하고 과거 적대 관계에서 부동의 동맹으로 전환됐다고 선언했다. 미일 관계를 다진 일본은 중국을 향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중일 정상회담을 집요하게 타진하는 동시에 9월 3일 항일 전승절에도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일본 신문의 보도가 나왔다. 일본의 패전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만나겠다고 나서는 것. 이런 변화 기류 속에서 하반기에 줄줄이 예정된 다자 외교 무대나 한중일 정상회의에서까지 원칙에만 매달리다간 동북아 외교 지형 변화 구도에서 미아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한중일 정상회의로 계기 마련되나
요동치는 동북아 질서는 위기지만 동시에 새로운 변화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강대국들의 세력이 조정되는 과정에 한국이 빈틈을 파고드는 외교력을 발휘하면 전략적 공간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는 미국과 중국의 꽉 막힌 틀을 뚫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접근법이 될 수 있다. 김흥규 아주대 교수는 “중국 전승절에 참석하는 대신 한중일 정상회의를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며 “이를 계기로 대북 관계에서 중국이 행동에 나서도록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10월 1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동북아 안정과 평화를 위한 한국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면 된다는 것.
진창수 세종연구소장은 “중국에 있어 한국은 일본 고립을 유도하는 전략적 카드이자 미국과의 관계에서 완충지대”라며 과거와 미래를 분리한 ‘투 트랙’ 전략을 강화하는 실리 챙기기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일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미국의 주문을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적 요인도 있다.
외교 당국은 ‘실리 외교’ 기조에 맞춰 한중일 정상회의 성사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르면 10월 서울에서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이를 계기로 하반기 동북아 외교 주도권을 잡겠다는 전략이다. 다자에서 양자로, 비안보 이슈에서 안보 이슈로 점진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면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18일 “우리나라는 의장국으로서 일본, 중국 양측과 연내 3국 정상회의 개최를 위한 의견 조율을 계속해 오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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