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사 명장면]반세기 장벽 허문 ‘마오타이 협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4일 03시 00분


[광복 70년]암호명 ‘동해 사업’ 수교 뒷얘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금지된 지역’이었다. 중국인들 중에 그곳(한국)에 가본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의 주역 중 한 명인 첸지천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자신의 회고록 ‘10가지 외교의 기록(外交 十記)’에서 한중 수교 과정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1990년대 초반 한중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한중 수교는 극적으로 전개됐다. 아울러 많은 비화도 남겼다.

한중 수교는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 전략과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의 실용적 철학이 서로 맞아떨어져 이뤄졌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은 오랜 우방이었던 대만과 단교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중국은 혈맹인 북한에 실망감을 안겨줬다.

초대 주한 중국대사로 부임해 6년간 근무했던 장팅옌(張庭延) 중한우호협회 회장은 수년 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중 수교를 한 달여 남겨 놓고 북한의 김일성에게 이를 통보했을 때의 뒷얘기를 소개했다.

장 전 대사는 1992년 7월 15일 첸 외교부장을 수행해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후 곧장 헬기로 갈아타고 40분 비행해 연풍호반 별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첸 부장이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한중 수교 시기가 성숙했다. 북한의 이해와 지지를 구한다”는 취지의 구두 메시지를 전하자 김일성은 굳은 표정으로 “이미 결정됐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는 어떤 난관이 있어도 극복합니다”라고 대답한 뒤 입을 닫았다고 한다.

사실 덩샤오핑은 이미 수교 10개월 전인 1991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한중 수교 계획을 시사했다. 덩은 “역사적으로 동맹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군사 동맹도 믿을 수 없다”는 말로 중국이 북한과의 동맹에만 얽매일 수 없다는 점을 북한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한중 양국은 수교를 향한 큰 방향에 합의한 뒤 비밀 교섭창구를 만들어 극비리에 협상을 진행했다. 한국 외무부의 수교 협상 암호명은 ‘동해 사업’. 당시 이상옥 장관 이하 불과 몇 사람만이 알았다. 예비교섭 수석대표였던 권병현 전 주중 대사는 외교부 직원들에게조차 시골 부친이 병환이 났다고 둘러대고 청사에 나오지 않았다. 후에 주중 대사를 지낸 당시 신정승 외무부 동북아 2과장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하고 수교 작업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권 전 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협상 과정에서 무지하게 많이 싸웠다. 반세기에 걸친 단절과 응어리를 풀어내기 힘들었다”며 “그때마다 협상 테이블에서 마오타이주(사진)를 많이 마셨다”고 털어놨다. 권 전 대사는 마오타이주가 협상 타결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다며 ‘한중수교주’라는 별명도 붙였다.

장옌팅 전 대사는 1992년 6월 3차 비밀회의를 위해 중국 대표단이 홍콩을 거쳐 꼬박 하루 걸려 서울에 도착했으나 입국장에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아 당황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한국 측으로부터 언론에 노출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한중 양국은 지난해 인적 교류가 1000만 명을 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우호관계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양국 모두 국내외의 반대와 역경을 딛고 두 손을 굳게 잡은 수교 당시가 진정한 ‘밀월’ 관계였다는 평가도 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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