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지뢰 도발과 포격 도발로 남북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주민대피시설이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됐는지 드러났다. 정부가 마련한 접경지역 대피소는 안전 기준에 못 미치는 사례가 허다했다. 서울에도 4000여 개의 대피소가 있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판 여론이 커지자 국민안전처는 전국 시군구에 2만3000여 개에 달하는 대피소를 이틀 안에 점검하라는 형식적인 지시를 내려 탁상행정이란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국민안전처는 23일 “내일(24일)부터 이틀간 전국 2만3628개 주민대피시설을 일제 점검한다”고 밝혔다. 현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우리 구에 대피소 200여 개가 있는데 이틀 안에 점검하라는 건 형식적으로 하라는 얘기와 같다”고 말했다. 6월에 실시된 점검은 11일 동안 이뤄졌다고 한다. 안전처 관계자는 “워낙 다급해 빠른 시일 안에 조사를 끝내라는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형식적 점검만 반복될 뿐 관리는 미흡했다. 안전처 성기석 민방위과장은 “점검 내용을 바탕으로 개선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서울의 한 구청 담당자는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는 없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서울 종로구의 한 주민센터는 점검 공문이나 지시를 받지 못해 손을 놓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제구실을 못하는 대피소가 상당수였다. 서울 성동구의 한 횟집은 2006년 공공 대피시설로 지정됐다. 국가재난정보센터 홈페이지와 ‘안전디딤돌’ 애플리케이션은 690m²의 면적에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이 횟집은 건물 2층이라 대피소로 부적절했다. 1층에 버젓이 대피소 표지가 있지만 지하에도 스크린골프장이 들어와 있어 대피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성동구청 관계자는 “사용이 불가능한 대피소는 지정 해제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횟집 인근의 한 아파트 지하 대피소 안에는 주민들이 가져다 놓은 책꽂이 등 살림살이가 가득했다. 관리소 직원은 “1년 넘게 점검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청 관계자는 “상하반기 두 번의 일제점검 외에도 분기별 점검을 했다”고 밝혔지만 누락된 곳이 수두룩했다.
정부가 지은 263개 대피소 외에는 명확한 관리 규정이 없는 것도 문제다. 면적이 60m² 이상에다 방송 청취만 가능하면 대피소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하철역, 관공서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민간시설이라 비상 구호품을 갖추거나 공간을 쾌적하게 유지하도록 강제할 방법이 없다.
북한 포격으로 긴장감이 감돌았던 접경지역도 사정은 비슷했다. 정부지원대피소는 △1인당 면적 1.43m² 이상 △주출입구와 비상 탈출구 설치 △주출입구는 북쪽을 피해 설치 △포탄의 완충 작용을 위한 60cm 흙덮기 등 세부 기준에 따라 설치된다. 기준만 있을 뿐 지키지 않은 시설이 많다는 점이 문제다.
25일 확인 결과 경기 연천군 정부지원대피소 5곳(횡산리, 삼곶리, 도신리, 고대산, 대광리 대피소) 모두 천장을 흙이 아닌 콘크리트로 덮어놨다. 연천군 관계자는 “흙 위에 콘크리트를 덮은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기준에 어긋난다. 중면 삼곶리 대피소와 횡산리 대피소는 출입구가 1곳뿐이었다. 출입구 방향이 북쪽으로 나 있어 북쪽에서 날아오는 포격에 취약한 곳도 3곳이나 됐다.
주민 강모 씨(51·중면 삼곶리)는 “2011년 연평도 포격 이후 급하게 만들다 보니 졸속으로 지은 대피소가 많다”며 “천장을 흙으로 덮어 놓으면 평소 제초작업 등을 해야 하는데 관리가 어려워 콘크리트를 덮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콘크리트로 덮인 대피소 위에 포탄이 떨어지면 충격 완충 작용이 없어 대피소 안의 사람들은 고막에 큰 부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명예교수는 “미국의 하와이 와이키키 벙커는 안전 요원들이 직접 상주하면서 식료품을 주기적으로 교체한다”며 “우리도 휴전 상황인 만큼 적극적인 대피소 관리에 나서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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