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金 “5만달러이하 투자 출처 불문”… 신진그룹과 ‘충성 거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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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등장 5년, 북한은 지금]<1>조기붕괴 예상 깬 정치권력

김정일 옆에서 후계자 행보 김정일 사망 두 달 전인 2011년 10월 17일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아들 김정은과 함께 함경남도 함흥의 한 공장을 시찰하며 웃는 사진을 실었다.사진 출처 노동신문
김정일 옆에서 후계자 행보 김정일 사망 두 달 전인 2011년 10월 17일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아들 김정은과 함께 함경남도 함흥의 한 공장을 시찰하며 웃는 사진을 실었다.사진 출처 노동신문
《 2010년 9월 27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지휘성원들의 군사칭호를 올려줄 데 대한 명령’ 제0051호를 하달했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비롯해 김경희 당 경공업부장(김 위원장의 여동생), 최룡해 노동당 비서, 현영철 인민군 8군단장, 최부일 인민군 부총참모장, 김경옥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을 대장으로 승진시킨다는 발표였다.

그해 26세였던 ‘김정은’ 이름 석 자가 북한 관영 매체의 보도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당시 정보기관과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이 김정은 3대 세습을 공식화한 것으로 평가했다. 한국 언론들도 김정일의 3남 이름을 ‘김정운’으로 표기해 오다 이 발표 이후 김정은으로 정정했다.

김정은은 대장 승진 발표 하루 뒤인 9월 28일에 열린 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를 통해 처음 공식석상에 얼굴을 드러냈고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 자리까지 거머쥐었다. 이듬해 12월 17일 아버지 김정일이 갑작스럽게 심근경색으로 숨지면서 김정은은 약 4개월간 애도기간을 거쳐 2012년 4월 11일 노동당 제1비서, 이틀 뒤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취임하면서 1인자 자리에 올랐다.

이후 김정은은 공포의 숙청을 통해 권력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김정은 공식 등장 이후 북한을 탈출한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은 지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김정은 등장 5년을 맞아 본보는 외국 전문가와 탈북자 30여 명을 지난 2개월간 심층 인터뷰해 간접적으로나마 북한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추적했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변화상을 4회로 나눠 보도한다. 》

‘어리고 미숙하다’는 평가에도 김정은이 4년 가까이 끄떡없이 권좌를 지키고 있는 비결은 뭘까. 우선은 오랜 시간 북한 사회에 내재된 순수 혈통이 주는 배타적 정통성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한 노동당 간부 출신 고위급 탈북자는 “김정은 체제를 지탱하는 5할은 ‘김일성’이라는 신적 영역이 만들어놓은 주민들의 잠재의식이고 3할은 공포정치와 굳건한 감시 시스템, 그리고 2할은 개인적 리더십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탈북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내려오는 이른바 ‘백두 혈통’은 북한에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라며 “수십 년 동안 다져놓은 이들에 대한 신격화는 주민들의 머릿속에 ‘수령은 백두혈통만 할 수 있다’는 잠재의식을 세뇌시켰다. 김정은이 집권 이후 외양과 행동까지 할아버지 김일성을 흉내 내는 것은 주민들의 이런 잠재의식을 활용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했다.

‘백두혈통 세뇌 효과’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달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이 발표한 탈북자 656명 대상 설문조사를 보면 ‘주민 과반수가 김정은을 지지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62.7%나 됐다. 이 조사는 2012년부터 2015년 사이 매년 탈북 1년 미만 탈북자 100여 명을 선정해 진행됐다.

○ 붕괴 가능성 당분간 작아

최근 북한을 오간 해외 북한 전문가들 중에는 김정은 정권의 붕괴 가능성이 당분간 희박하다는 시각이 많다. 대니얼 핑크스턴 국제위기기구(ICG) 서울사무소장은 “(북한 입장에서만 보면) 김정은은 상당히 유능한 독재자로 보인다”며 “김정은의 후세대까지 4대 권력 세습이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적어도 수십 년 동안 김정은의 통치가 견고히 유지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제니 타운 38노스 책임연구원도 “북한 현지 경제 상황이 상당히 호전되어 가고 있고 연속적인 가뭄에도 쌀 가격 등은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북한에서 자생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시장 경제 활동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주민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평이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해 김정은은 ‘5만 달러까지는 그 출처를 따지지 말라’며 자본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하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과거 투자금의 출처를 꼼꼼히 따지고 사회주의법에 반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투자금을 즉각 회수했던 것과는 차별화된 변화라는 것. 그만큼 이윤을 목적으로 한 개인투자자들의 활동 범위도 이전보다 넓어졌다는 것이다.

○ 뉴제너레이션의 등장

김정은 체제에서 가장 주목되는 권력계층은 충성 경쟁을 벌이는 신진 엘리트 집단이다. 관료 출신 한 탈북자는 “김정은은 2012년 중간급 간부들을 50대 미만으로 교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십 년간 보좌해온 측근들이 뒤로 물러나고 신진 엘리트들이 권력을 잡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야심만만한 신진 엘리트들이 김정은의 눈에 들기 위해 그의 명령을 물불 가리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북한을 빠져나온 간부 출신 탈북자는 “김정은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유일 영도 체제’는 단순히 공포정치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며 “신진 엘리트들이 북한 정권을 탄탄하게 떠받치고 있다”고 했다.

해외에 체류 중인 한 북한 간부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충성심 때문만이 아니다. 북한에선 권력과 부가 비례한다. 큰 권력을 잡을수록 이권에 개입하거나 뇌물을 받아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숙청으로 자리가 비는 만큼 기회가 생기는 것이어서 그 자리를 새로운 신진세력이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이른바 외국 물을 먹은 세대들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북한대학원대 이우영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는 최대 15만 명에 육박한다. 이 교수 연구팀은 최근 2,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에 나와 있는 북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생활 실태와 인식 조사를 해 오고 있다. 김정은 시대 들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해외에 파견된 근로자가 김정일 시대에 비해 2배 이상 많아졌을 뿐 아니라 이들이 북한에 돌아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도 상당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북한에 돌아가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해외 노동 경험을 ‘공통분모’로 정기적으로 만나거나 자신들만의 정보망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해외 생활을 통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향후 북한 변화를 이끄는 동인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북한 내 신흥 부르주아나 해외 노동 경험이 있는 해외파들은 아직까지는 북한 당국과 협조하고 야합하는 세력”이라며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이들이 생각하는 이득과 북한 당국의 이득이 상충할 때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 민심은 이탈… “평양서 김정은 뉴스 나오자 볼륨 줄이기도” ▼

숙청 부른 자라공장 시찰 올해 5월 19일 대동강자라공장에 간 김정은은 지시 불이행에 크게 화를 냈다. 이 공장 당비서는 이후 불만을 토로했다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출처 노동신문
숙청 부른 자라공장 시찰 올해 5월 19일 대동강자라공장에 간 김정은은 지시 불이행에 크게 화를 냈다. 이 공장 당비서는 이후 불만을 토로했다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출처 노동신문
○ 노동당이 등을 돌린다

하지만 내부 균열도 커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간부들의 불만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간부들이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못할 뿐이지 불만은 매우 크다”고 덧붙였다. 무리한 요구라도 따르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 김정은 시대 들어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와는 달리 당원들이 이탈하는 등 하부 조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다. 우선 당의 통제하에 국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사회주의 국가 시스템이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다.

함경북도 주민 A 씨는 국영기업 하급 간부였지만 3년 전부터 공장에 나가진 않는다. 대신 공장에 매달 북한 돈 5만 원을 내고 있다. 현재 북한 암시장 달러 환율 8200 대 1을 적용할 때 5만 원은 약 6달러(약 7100원)이다. 이 돈이면 장마당에서 쌀 10kg, 옥수수 30∼40kg 정도를 살 수 있다.

서류상으로만 공장에 소속된 A 씨는 가을에는 송이버섯을 캐고, 여름 3개월은 바다에서 오징어를 잡는다. 직장에 5만 원을 내고도 충분히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짭짤하다. A 씨는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직장에 매이기보다는 이 편이 훨씬 자유롭고,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다”며 “배급제도가 되살아나 과거 사회주의 체제로 돌아갈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때로 돌아갈까 봐 겁을 낸다”고 전했다.

A 씨 사례는 김정은 체제 이후 급격히 해체되는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 시스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과거 수십 년간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전통적 기반은 ‘인민대중-노동계급-노동당-핵심 통치 집단-수령’이었다. 하지만 인민대중과 노동계급의 상당수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심적으로 수령으로부터 이탈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는 국가와 지도자가 자신들을 먹여 살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스스로 자기 살길을 개척하고 있다.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지도자에 대한 불신은 오히려 당원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 대상인 2013년 이후 탈북한 주민 291명 중 46명은 북한에서 당원이었다. 조사에서 당원 출신 탈북자의 82.6%가 북한 경제가 어려운 이유를 최고영도자 때문이라고 답했다. 비(非)당원 출신 탈북자는 이보다 적은 70.4%가 경제난의 책임을 김정은에게 돌렸다.

○ 당원도, 간부도 기피 대상

이런 분위기 속에 노동당원과 간부의 인기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 특히 김정은 체제 들어 간부를 기피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지난해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B 씨는 고위직 진출이 가능할 정도로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이상 당원도 되지 않으려는 풍조가 팽배해 있다고 전했다.

“옛날엔 당원이 돼야 간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어코 당원이 되려 했다. 당원이 되려고 수백 달러씩 뇌물을 바치던 것이 6∼7년 전이다. 하지만 이제는 당원이 되라고 비서가 사정해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원이 되면 통제도 더 강해지고, (비리를 저질렀을 때) 처벌도 비당원보다 몇 배 더 세기 때문이다.”

간부 기피 바람은 보위부와 같은 권력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올해 탈북한 북한 관료 출신 C 씨는 평안남도 ○○군 보위부의 경우 정원의 반밖에 차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보위부는 정치적 범죄만을 다루는데 요새는 주민들의 신고가 줄어 정치범을 잡기가 힘들다”고 전했다. 이런 당원과 간부 기피 현상은 북한 체제를 지탱하던 하부 조직이 급격히 썩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은이 지난 3년 반 동안 공포통치를 펼치는 사이 북한의 팔다리가 서서히 마비되고 있는 셈이다.

○ 주민들 “너는 김정은, 나는 나”


“누가 지도자가 되건 관심도 없다. 관심이 있다 해도 우리가 뭘 어떻게 할 힘도 없다. 그냥 ‘너는 너대로 왕 노릇 해라, 우린 우리대로 산다. 제발 우리를 못살게 굴지만 말아 달라’는 분위기다.”(함경북도 주민 D 씨)

“가족 먹여 살리기도 힘든데 김정은이 간부를 죽이건 말건 그건 남의 일일 뿐이다. 누가 처형됐다고 하면 또 누가 죽어나갔구나, 다음에 또 누가 죽어나가겠구나 다들 쉬쉬한다. 우리야 어차피 권력에 가까운 사람들도 아니니 죽을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어차피 수십 년째 이러고 사니까 그러려니 한다.”(양강도 주민 E 씨)

지난달 휴대전화로 본보 기자와 통화한 북한 주민들이 전한 현지 민심이다. 김정은 체제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의식은 ‘체념’과 ‘무관심’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에 관심을 끊고 돈이나 많이 벌자는 인식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집권 3년 반을 맞으면서 북한 정권이 과거 수십 년간 자랑해온 수령과 대중의 ‘혼혈일체(渾血一體)’ 전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혼혈일체는 주체사상에 뿌리를 둔 북한의 핵심 통치 구호로 모두가 수령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공동체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김정은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고위 간부들의 ‘상위 리그’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자기 돈벌이에만 몰두하는 평범한 주민들의 ‘하위 리그’로 갈라져 있다.

김정은 역시 주민들에겐 더이상 ‘경외의 대상’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통치자일 뿐이다. 최근 평양에서 근무하고 온 한 서방 외교소식통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평양의 한 식당에서 김정은 관련 뉴스가 나오자 시끄럽다는 듯 TV 볼륨을 줄여버리는 광경도 목격했다”고 전했다.

진희관 인제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김정은 체제는 과거(김일성 김정일 시대)와 달리 지도자와 핵심 권력 엘리트 간 유대감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며 “김정은과 핵심 권력 엘리트의 관계는 충성을 바치고 권력과 돈을 얻는 상업주의적 거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관계는 통치자금이 고갈되는 순간 금이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글 싣는 순서

<1> 조기붕괴 예상 깬 정치권력
<2> 떠오르는 ‘붉은 자본가’
<3> 북한 시장화의 그늘
<4> 외부로 분출되는 북한의 욕망

주성하 zsh75@donga.com·김정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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