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강남역 주변의 S공인중개사무소. “이 근처 84m² 아파트 전세를 알아보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공인중개사는 대뜸 전세자금의 ‘출처’를 입증할 수 있는지부터 물었다. 84m²짜리 이 지역 아파트의 평균 전세 시세는 8억 원대다. 공인중개사는 “고액 전세에 대한 세무조사가 확대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어떻게 하면 부모 돈으로 전세를 얻을 수 있느냐’고 문의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며 “부모 자식 간이라도 차용증을 쓴 뒤 이자까지 붙여 돈을 갚고 있다는 증빙을 갖추라고 조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 일대와 경기 분당·판교신도시, 대구 수성구 등 고액 전세주택이 몰린 지역을 중심으로 ‘전세 세무조사’의 파장이 심상치 않다. 국세청이 고액 전세 세무조사의 기준을 보증금 10억 원 미만으로 낮추고, 조사 대상도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전국으로 넓힌다는 동아일보 보도에 고액 전월세 세입자들이 세무조사의 표적이 될까 봐 당국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가장 민감한 사람들은 자녀 교육 등을 위해 부모에게 목돈을 얻어 강남 지역에 전세를 사는 30, 40대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송파구 잠실동 등 최근 수년 사이 완공된 재건축 아파트 밀집지역에 이들이 집중돼 있다. 잠실동 리센츠아파트 근처 A공인중개사무소의 대표는 “세무조사 관련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전세 문의가 하루 5건 이상 있었지만 이번 주 들어 한두 건으로 줄었다”며 “전세 성수기란 점을 고려할 때 이례적인 일”이라고 푸념했다.
일부 세입자들은 증여세 조사를 피하기 위해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있다. 반포동 B공인중개사 대표는 “예전에는 전세금 10억 원 이상이면 세무조사를 받는다고 해 ‘9억9700만 원’짜리 계약을 맺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지금은 소용없게 됐다”며 “보증금 8억5000만 원에 전용 84m²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350만 원을 내는 식으로 보증금 비중을 최대한 낮춰 계약을 갱신하려 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소수이긴 하지만 집주인이 보증금을 낮추는 경우도 있다. 잠실동 엘스, 트리지움 등에서 전용 120m² 이상 대형을 중심으로 전세 호가를 2000만∼3000만 원 낮춘 아파트들이 나오고 있다. ▼ 은행 PB센터에 ‘전세금 증여’ 문의 빗발 ▼
고액전세 세무조사 파장
세무조사 여파로 고액 전세 수요는 줄고, 당장 월세로 돌리자니 현 세입자에게 내줄 보증금을 마련하기 힘든 집주인들이 마지못해 전세금을 내리는 것이다. 수요에 비해 전세 물건이 워낙 귀한 5억 원 안팎의 일반 전세 시장에는 별다른 영향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신조 내외주건 대표는 “수도권에서 전세금이 매매가의 90%를 넘는 단지가 전체의 10%를 넘을 정도로 공급이 모자란다”면서 “전세 호가가 낮아지는 현상은 일부 고액 물건에 제한된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에는 증여세 절세 방법을 묻는 자산가들이 부쩍 늘었다. 문진혁 우리은행 고객자문센터 세무팀장은 “자녀를 결혼시키면서 전세금으로 5억∼6억 원 주는 방법을 묻는 사람들이 급증했다”며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나눠 증여해 오지 않았다면 증여세를 내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조언한다”라고 말했다. 국세청은 주요 고액 전세 지역의 일부 의심스러운 세입자들에 대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고 내부 검증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조사 방침이 대대적으로 알려진 만큼 최대한 신속하게 고액 전세에 대한 현장 조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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