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집권 이후 평양의 변화를 보려면 저녁에 젊은이들로 붐비는 개선청년공원이나 능라유원지에 가보면 된다. 처녀들 옷차림이 야해졌고 커플들이 팔짱을 끼고 활보한다. 5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지난해 북한을 탈출한 평양 출신 탈북자는 “평양 여성들의 패션이 바뀐 건 퍼스트레이디 이설주의 공이 크다. 이설주가 하는 목걸이, 귀걸이, 반지, 명품 가방은 곧 유행이 된다.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짧은 스커트도 이설주가 입은 뒤 유행이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평양의 고급 상점가인 모란봉구역 북새거리에서는 개당 가격이 1만 달러(약 1180만 원)가 넘는 한정판 롤렉스 시계도 팔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 화사해진 평양 거리
젊은이들의 급격한 패션 변화에 북한 당국은 한때 당황해 단속에 나섰지만 지금은 손을 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 체제 초창기엔 규찰대가 길거리에 나가 ‘김정은 동지와 이설주 동지의 머리 모양은 따라 해도 좋지만, 목이 깊게 파인 옷이나 짧은 치마,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7분 바지) 같은 옷은 따라 입지 말라’며 일일이 검열을 했었다. 하지만 막을 수가 없다 보니 곧 포기했다.”(대북 소식통 A 씨)
서울에서 만난 한 탈북자는 “지난해 말 북한에 사는 친척이 남쪽에서 발행되는 헤어 패션잡지 이름을 불러주며 그 잡지를 구해 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며 “미장원에서 그런 잡지를 몰래 숨겨두고 있다가 단골에게 보여주면서 남조선식으로 머리를 해주면 3배나 비싸게 요금을 받을 수 있다”라고 전했다.
스마트 기기 열풍도 거세게 불고 있다. 요즘 평양에선 학생이나 젊은이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까지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김정은이 집권 이듬해인 2013년 8월 북한산 스마트폰인 ‘아리랑’ 생산 공장을 시찰하는 등 첨단 정보기술(IT) 기기 보급에 큰 관심을 보인 뒤로 평양의 정보화 바람이 더 거세진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본보와 인터뷰에서 “요즘 평양 명문대의 일부 신입생들은 싱가포르에서 수입한 최신형 애플 노트북을 들고 와 강의 내용을 꼼꼼하게 메모하곤 한다”며 “한국이나 미국의 대학가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전했다.
올해 평양에는 국영 모바일 홈쇼핑(옥류)에서 상품을 사고 전자카드(나래)로 결제하는 서비스까지 시작됐다. ‘옥류’를 이용하면 ‘해당화관’ ‘해맞이식당’처럼 유명 식당 음식을 국영 운수사업소 배달서비스를 통해 집에서 먹을 수 있다. 아직은 구매 가능 품목이 많지 않지만 확장 가능성은 크다.
IT 기기 보급 확대의 영향으로 남한, 미국 등 외부 문화 콘텐츠를 접하는 북한 젊은이도 늘어나고 있다. 휴대용 저장장치 등을 이용해 외국 영화나 드라마, 전자책 등의 콘텐츠를 노트북과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이 2011년 이후 탈북한 주민 6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 한국의 방송 영화 드라마 노래 등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80% 이상으로 나타났다. 학력이 높을수록, 소득이 많을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남한 문화 경험이 많았다.
중국 방문 중 본보와 전화 연결이 된 한 평양 주민은 “현재 북한에서 한국 노래를 가장 많이 유통시키는 세대는 중학생으로 특히 여중생들이 활발하다”며 “(북한 당국이) 평양의 모 중학교에서 학생들의 가방을 불시에 수색했는데 한국 노래가 적혀 있지 않은 수첩이 없을 정도였다. 수첩 하나에 수백 곡의 한국 가요가 적혀 있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일반 사회인들보다는 군인들이 한국 노래를 더 많이 부르고 있다”며 “다양한 연령대가 어우러져 있는 일반 사회 조직보다는, 비슷한 연령대가 모여 10여 년 동안 함께 생활하는 군인들이 더 동질성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보통신 기기에 눈을 뜬 북한 주민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점 중 하나는 전기다. 전력 부족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 중에는 중국산 태양광 전지판을 구입해 설치하는 집도 늘고 있다. 20W용 태양광 전지판 하나는 북한 돈으로 35만 원(약 4만7000원)이다.
○ 외부에 대한 호기심도 커져
최근 평양을 다녀온 외국인들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상 속 자유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전한다. 실제 만나본 북한 관료들의 태도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고도 했다.
매년 세 차례 북한을 방문해 행정 관련 세미나를 열어 온 독일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관계자는 “과거엔 형식적인 질문 몇 개만이 오갔지만 최근엔 간부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질문을 쏟아내 놀랐다”며 “최근에는 점심식사를 같이하는 것도 허용됐다”고 전했다.
올봄 평양을 방문했었다는 전직 독일 시장은 “최근 북한 간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관광업”이라며 “내가 시장으로 있던 도시가 어떻게 관광도시로 탈바꿈했는지 자세히 물으면서 그 과정에서 총리가 어떻게 결정했는지까지 물었다”고 말했다.
외국어 배우기 열풍도 개방 바람을 상징한다. 평양 출신 탈북자들에 따르면 평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중국어와 영어 과외가 크게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의 경우 강사 수준에 따라 월 20∼30달러인데 중국어는 조금 더 비싸다고 한다.
최근 평양을 방문한 한 미국 인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려호텔에서 통역 없이는 체크인이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는데 얼마 전 가보니 직원들이 영어를 해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 서양 따라 하기 열풍
파견이나 사업 형태로 외국 생활을 체험한 북한 주민들이 늘면서 “외국처럼 잘살아 보자”는 바람도 불고 있다. 이들의 욕구가 가장 많이 반영되는 분야는 ‘집’이다. 주택 구매에 대한 당국의 통제가 유명무실해져 국가가 발행하는 주택 사용허가 서류인 ‘입사증(入舍證)’이 자유롭게 매매되면서 돈을 벌어 좋은 집에 살겠다는 것이 주민들의 꿈이 되고 있다.
이러다 보니 평양 부동산 가격도 매년 크게 뛰고 있다. 중국을 방문한 한 평양 시민은 시내 중심부에서 100m²(약 30평) 이상 되는 새 아파트 가격이 10만 달러(약 1억1800만 원)를 호가한다고 말했다. 신흥 부촌으로 뜨고 있는 보통강구역 북한 최고가 아파트는 180m²(약 50평) 이상의 크기에 20만 달러를 호가한다고 한다. 큰 방, 넓은 베란다, 대형 그림이나 화려한 무늬의 장식장 같은 것들이 부의 상징이 되고 있다. TV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들도 삼성과 LG 제품이 최고로 통한다. 다만 아무리 비싼 아파트라도 전기가 부족해 에어컨을 설치하지 못하고 물이 잘 나오지 않아 샤워하기 힘든 것이 단점이다.
김정은 체제로 들어서면서 평양에 중국식 대형 슈퍼마켓과 각종 해외 요리 전문 식당, 호화 물놀이장과 놀이장, 극장 등이 잇따라 건설되는 것이 해외 경험을 가진 북한의 부유층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말 평양 보통강구역에 1호점을 낸 북한 최초의 편의점 ‘황금벌상점’은 올해 안으로 평양 20호점 개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현재로서는 평양에만 국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위 간부를 지내다 최근 탈북한 B 씨는 “최근 김정은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한 대형 공사가 늘면서 주민 수탈이 김정일 시절보다 몇 배로 가혹해졌다. ‘젊은 놈이 더 지독하다’는 아우성이 빗발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초부터 최소 5명의 해외 파견 북한 고위급 무역 일꾼들이 탈북했는데 이들은 크게 늘어난 외화벌이 할당량을 감당하지 못하자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한국행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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