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0월호/턱시도 입은 슈퍼맨? 외교관 세계의 거친 민낯
영화와 드라마 속 외교관은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와인 잔을 들고 화려한 연회장을 누빈다. 그러나 포장을 한 꺼풀 벗겨낸 외교관들의 일상은 크고 작은 전쟁의 연속이다. 내전이라도 터지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 연간 해외 여행객이 1500만 명, 재외국민과 재외동포가 700만 명에 달하지만 외교관은 수백 명에 불과하다. 특권층도, 슈퍼맨도 아닌 현실 속 외교관의 세계.
박희채 전 캐나다 밴쿠버 영사(현재 NGO 월드셰어 대표)는 33년 외무공무원 생활 중 가봉, 리비아 등 이른바 ‘험지(險地)’ 주재 한국대사관 네 곳에서 근무했다. 그는 마지막 근무지 수단대사관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2008년 5월, 수단 최대 반군 조직(JEM)이 정부 전복을 목표로 수도 카르툼을 향해 진격하자 반격에 나선 정부군은 전투기를 동원한 융단폭격을 예고하며 지역 거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현지 교민 보호에 비상이 걸린 한국대사관이 긴박하게 비상연락을 취하던 중 공습 예고 지역(옴두르만)에서 한국인 선교사 1명이 미처 못 빠져나오고 숨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구출 2시간 뒤 격전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고, 태극기를 단 외교차량을 이용해 선교사를 구출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내가 가서 데려오겠다”는 이병국 당시 대사를 만류하고 박 전 영사가 나섰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일단 그쪽 지리를 잘 아는 운전기사부터 구해야 했다. 현지 (주)대우에 부탁해 20년 근무 경력의 운전기사를 구하고, 서병화 대우 전무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서 전무는 수단에서 15년간 생활해 현지 사정에 밝았다.
대사관에서 옴두르만까지는 약 4㎞. 정신없이 달려가는 동안 일행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전쟁영화의 한 장면 그대로였다. 도로 곳곳에 부서지고 불붙은 차량과 탱크가 널렸고, 길가 군데군데 조각난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기관총을 들고 탄띠를 둘러멘 정부군이 길목마다 검문소를 차려놓고 지켰다.
통행허가를 받고 수차례 검문소를 통과한 끝에 선교사를 찾아낸 일행은 공포에 질린 선교사를 달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차에 태워 출발했다. 검문소를 지키던 정부군이 “한 시간 내로 빠져나오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기 때문. 일행이 생사를 넘나든 구출작전에 성공한 지 불과 두 시간 뒤 반군과 정부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200여 명이 사망했다. 박 전 영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터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니 죽을 수도 있었다. 대사관으로 무사히 돌아오고 나서야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겁이 안 났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외교관으로서 그게 내 일이었고, 다시 그 상황이 닥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대다수 우리 외교관들도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남북 공관원 합동 탈출작전
뜻하지 않게 소설처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외교관이 또 있다. 소말리아 내전이 한창일 때 그곳 대사관에 근무한 강신성 전 대사는 1991년 1월 정부군이 반군에 패해 치안 능력을 상실한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하기 위해 공관 직원들을 이끌고 황급히 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처 이탈리아 대사관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그들의 구조 비행기에 탑승할 수 없었던 강 대사 일행은 그곳에서 같은 처지에 놓인 북한 대사 일행을 만났다. 군사전략지인 공항에선 언제 격전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강 대사 일행은 북한 공관원들을 설득해 함께 대사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대사관에서 불안으로 잠 못 이루는 사흘을 보낸 뒤 극적으로 비행기를 구해 남 · 북한 공관원 20여 명이 함께 총알이 빗발치는 ‘생지옥’을 뚫고 케냐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30대 초반의 북한 3등 서기관이 심장에 총을 맞고 절명했다. 공항에서 대사관으로 돌아오던 일행의 차를 반군의 자동차로 오인한 정부군이 집중사격을 퍼부은 것. 강 전 대사는 공직생활을 마친 후 당시 경험을 소설 ‘탈출’(한강출판사)에 담아 펴냈다.
최재근 전 총영사는 우간다 대사관에 근무하던 1982년 2월, 대사관을 나서 캄팔라 시내로 차를 타고 가던 중 무장강도 4명의 공격을 받았다. 오른쪽 다리와 왼발에 전치 3개월의 관통상을 입은 그는 영국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귀국했다. 최 전 총영사는 “끔찍한 과거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흔히 그려지는 외교관은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와인 잔을 든 채 화려한 연회장을 누빈다. 많은 사람이 외교관을 특권층 내지 적어도 일반 국민의 삶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인식한다. 현실은 어떨까. 남상욱 전 대사(현 외교협회 사무총장)의 말을 들어보자.
“외교관이라는 개념은 중세, 근세 이래 이탈리아에서 생겨났는데, 그때는 외교관이 국가 간 친선뿐 아니라 전쟁에도 관여하는 중책을 맡다보니 최상류층 귀족이 외교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외교관은 최고 엘리트다. 숫자가 매우 적고 입부(외교부)하기가 힘들며, 접수국(주재국)에서 면책특권 등을 누리다보니 일부 국민에게 특권층으로 비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가 후진국, 개도국이었을 때는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의 재외공관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당시 외교관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열악한 형편의 재외공관이 훨씬 많다. 한국이 잘살게 된 시기부터 역설적으로 우리 외교관들의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재외공관 수는 163개. 이 가운데 ‘특수지’, 일명 ‘험지’로 불리는 공관은 61개로 3분의 1이 넘는다. 험지 분류 기준은 현지 치안, 기후, 국민소득, 의료 및 교육수준 등이다. 험지 중에서도 리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예멘 4곳은 ‘위험지역’으로 분류됐다. 1~3년에 한 번씩 순환 근무가 원칙인 외교관들은 재외공관을 ‘냉탕’과 ‘온탕’에 비유한다. 외교관들은 “천국과 지옥을 절반씩 오가다보면 외교공무원 생활이 끝난다”고 말한다. 영화 속 안락하고 화려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열악한 환경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는 삶은 외교관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재외공관 3분의 1이 險地
미국 뉴욕의 유엔대표부에 근무하던 김연식 서기관(당시 참사관)은 ‘대사관 창설’이라는 중책을 맡아 2013년 3월 혈혈단신으로 모잠비크 수도 마푸투로 향했다. 부부 외교관으로 함께 미국에서 근무하던 아내는 브루나이 대사관으로 발령받고 딸과 함께 떠났다. 본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모잠비크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일을 도와줄 행정관도 뽑을 새가 없었다. 뉴욕 병원에서 급히 황열병 등 5가지 풍토병 예방주사만 맞고 현지로 향했다.
마푸투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푼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청사와 관저를 구하는 일이었다. 발품을 팔아 100군데 넘는 곳을 둘러보고 겨우 점찍은 청사의 임차료는 월 2만 달러로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1만 달러로 계약했다. 당시 부동산 중개인은 그에게 “당신 인디언이냐. 가격을 어떻게 그렇게 마구 후려치느냐”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김 서기관의 말에서 그때의 고충이 묻어난다.
“현지 법률을 검토해 청사와 관저를 계약하고 본부에 요청해 통신시설을 설치하는 등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했다. 청사와 관저 수리 때는 공사 일정 등을 제때 안 지키는 현지 업자들과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은 재외공관을 창설하면 본국에서 건축전문가, 법률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창설팀이 파견돼 청사와 관저, 외교관 사저까지 전부 세팅해놓는다. 그 후에 외교관이 부임한다. 우리의 국격(國格)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부분이다.”
대사관 창설 준비와 함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방문, 모잠비크 대통령 방한을 준비하느라 동분서주하면서 우리나라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으로 지어진 병원 기공식에도 참석해 축사를 했다. 김 서기관은 “부임하자마자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초기 적응기를 건너뛴 셈이다. 너무 힘들어서 (공관 창설 업무를) 두 번 하라면 못하겠지만 외교관으로서는 좋은 기회이고 해볼 만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의료시설과 생필품 부족, 무더운 기후로 인해 창궐하는 풍토병 등은 험지에서 근무하는 외교관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괴롭힌다. 유창호 외교부 공보담당관(당시 참사관)은 2009년 에티오피아 대사관으로 발령이 났다. 아내와 함께 1세, 4세 자녀 둘을 동반한 그의 현지 생활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다.
“에티오피아는 유엔이 지정한 최빈국 중 하나다. 막내에게 먹일 가루분유가 없어서 서울에서 파우치(외교행낭)로 공수해야 했다. 전기시설이 열악해 날이 어두워야만 전기가 공급되고, 물도 부족해 돈을 주고 물차를 불러야 했다. 무엇보다 낯선 환경에서 아이들이 탈이 날까 걱정이 많았다. 변변한 의료시설도 없었는데 다행히 한국계 미국인 의사 부부와 친해져 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고산병 후유증 앓는 부부
남 전 대사는 “일반인이라면 평생 못 겪을 열악한 환경과 위험한 상황을 외교관은 종종 겪는다. 피할 수 없다. 그건 외교관의 숙명”이라고 했다. 남 전 대사 부부는 에콰도르 근무 때 얻은 고산병 후유증을 지금도 앓고 있다. 공기 중 산소가 30% 부족한 해발 2800m에 위치한 수도 키토에서 2년간 생활하면서 얻은 건망증과 불면증이 회복되지 않은 것. 현지에서 심한 두통을 앓던 아내는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두통 때문에 아스피린을 끊지 못한다.
직업 외교관의 삶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자녀 문제다. 외교관 부모의 임지를 따라 생활환경, 교육환경이 다른 지역을 수시로 옮겨 다녀야 하는 미성년 자녀들이 겪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때문에 외교관들 사이에 자녀 문제는 공공연한 비밀이자 금기어라고 한다. 학원이나 과외는 꿈도 꾸기 어렵다. 국제학교가 있다지만 웬만한 선진국이 아니면 교육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 상태로 국내에 들어오면 중·고교 적응이 어려울 뿐 아니라 대학 진학도 만만치 않다. 케냐와 수단 대사관 등에서 근무한 이병국 전 대사는 이렇게 전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굉장히 빡빡하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 한국말이 어눌한 아이들은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교육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외교관 자녀 중에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적지 않은 이유다. 요즘은 민간과 공공을 막론하고 해외 파견 직원이 워낙 많기 때문에 자녀들의 특례입학을 둘러싼 경쟁도 치열해졌다. 외교관 자녀가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성공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다. 전직 외교관 중에 자녀 문제로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속을 끓이는 사람이 많다.”
재외국민을 근접 상대해야 하는 외교관은 ‘24시간 대기’ 상태일 때가 많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잠비크 대사관 근무 시절 김연식 서기관은 오전 5시에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수도 마푸투에서 북쪽으로 2000㎞ 떨어진 도시 펨바에서 ‘한국 청년’이 납치됐다는 전화였다.
“알고 보니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부모한테 전화해 납치극을 꾸민 거였다. 남아공에서 신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갑자기 납치돼서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펨바에 있다니까 전화도, 카톡도 안 되는 부모가 얼마나 놀랐겠나. 본부(외교부 재외국민보호과)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2~3시간 만에 행방을 확인했다. 청년이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장작 사서 사막에서 火葬
2000년대 중반 수단에서 50대 중반의 황모 씨가 사기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다 옥사(獄死)하는 일이 발생했다. 박희채 전 영사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침대 위 흰 천으로 덮인 시신을 본 그는 분노했다. 감옥에서 차고 있던 커다란 쇠사슬이 발목에 그대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담당 경찰을 불러 당장 쇠사슬을 풀라고 소리쳤지만 교정기관 담당자는 “의사가 사망진단서에 사인을 해야 풀 수 있다”고 버텼다.
“워낙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는 나라이다보니 망자(亡者)에 대한 예의는 찾아볼 수 없었고, 모든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했다. 화장장이 따로 없는 나라인지라 사막에서 장작을 사서 시신을 화장했다.”
황씨의 아내와 함께 사막에서 돌아오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렸다. 사기 사건 채권자들이 채무자 황씨가 죽자 대신 황씨 아내를 고소하는 바람에 법원이 박 전 영사까지 법정에 출두하라고 명령한 것. 면책특권이 있는 외교관은 법정에 안 나가도 되지만, 남편을 잃자마자 구속될 위기에 놓인 부인의 처지가 딱했다. 장례비도 못 낼 만큼 가진 게 없었다. 박 전 총영사는 법정 출두 전날 긴급구난활동비로 부인과 아이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한 뒤 외교관들이 이용하는 공항 VIP룸으로 가족을 데려갔다. 발각됐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마지막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VIP룸을 빠져나와 겨우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소외감, 상실감, 박탈감…
긴급구난활동비는 해외에서 대형 사건 ·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또는 긴급 상황에 처한 재외국민을 지원하기 위해 재외공관이 활용할 수 있는 외교부 예산이다. 예산이 많지 않다보니 외교관이 사비를 털어야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병국 전 대사의 얘기다.
“해외여행객 중에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대사관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외교관이 사비를 털어 남은 여행 기간 동안 쓸 최소 경비나 비행기 티켓 값을 마련해주면 ‘돌아가서 꼭 갚겠다’ 해놓고 실제로 갚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외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외교관들에겐 지켜야 할 ‘영사조력범위’라는 게 있다. 도와주고 싶어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규정을 알려주면 ‘국민 세금’을 들먹이며 난리 치는 사람들이 있다. 재외공관 외교관들이 굉장히 좋은 대접을 받고 주재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외교관도 현지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결코 슈퍼맨이 아니다.”
남상욱 전 대사는 시시각각 ‘총성 없는 외교전쟁’이 벌어지는 미국을 비롯해 일부 선진국을 제외한 험지 외교관들은 ‘잊힌 존재’라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외교 비중이 떨어지고 큰 이슈가 거의 없다보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본부에서도 관심을 덜 쏟는다. 그래서 소외감과 상실감을 갖게 되고, 외교관 자신뿐 아니라 가족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시켜야 하기에 상대적, 심리적 박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2009년 6월, 카메룬 대사관에 근무하던 40대 초반의 유홍근 참사관이 공무로 일시 귀국했다가 과로에 의한 심근경색으로 순직했다. 당시 30대 중반의 아내와 2세, 8세의 남매를 두고 떠났다. 두 달 앞서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40대 후반의 박호정 영사가 교민행사 참석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들을 포함해 1990년부터 지금까지 순직한 외교관은 21명에 달한다. 법에 따라 순직 처리는 되지 못했지만, 지난 4년여 동안 본부 출장 중 사망하거나 현지에서 교통사고 등으로 숨진 외교관도 5명에 이른다. 같은 시기 현지에서 박테리아 감염, 저체온증으로 숨지거나 국내에서 암으로 숨진 외교관 배우자는 4명이다.
연간 해외여행객이 1500만 명을 넘어섰다. 재외국민과 한국계 외국인을 합한 재외동포 수는 700여만 명에 달한다. 이들을 위해 재외공관에서 일하는 외교관은 수백 명에 불과하다.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하고 적은 인력과 예산으로 밤낮없이 뛰어야 하는 그들의 어깨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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