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북한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 사진 왼쪽)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만남을 통해
북한은 6자회담 복귀의 길을 열었고 9·19 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졌다. 2002년 10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외교통상부 장관
공관에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오른쪽 사진 왼쪽)와 최성홍 외교통상부 장관이 만나고 있다.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켈리 차관보는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고 밝혔고 2차 북핵 위기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동아일보DB
2002년 10월 3∼5일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방북을 하루 앞두고 켈리 차관보는 최성홍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나 방북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에 방북해 북한에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를 직설적으로 제기하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미국 정부가 ‘북한이 핵동결 약속을 파기했다’고 한국 정부에 공식 통보한 것이다.
10월 3일 켈리 차관보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에게 “우리는 북한이 제네바 핵동결 합의를 위반했으며 핵무기용 HEU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라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하지만 김계관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이틀째 협상에는 김계관의 상관인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나왔다. 켈리는 미 정보기관이 파악한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을 제시했다. 그러자 강석주는 순순히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한 뒤 충격적인 발언을 내놨다.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당을 대표하는 것이다. 미국이 북조선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는 핵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entitled to) 있다. 핵무기로 위협하는 미국은 우리의 농축우라늄 활동을 중단하도록 요청할 권한이 없다.”
2차 북핵위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HEU 시인
켈리 일행은 경악했다. 켈리 차관보는 “들었지? 지금 얘기, 분명히 말했지?”라며 귀를 의심했다. 당시 배석한 미국 통역사는 3명. 3명은 면담이 끝난 뒤 각각 받아 적은 발언 기록을 여러 차례 맞춰 봤다.
강석주는 덧붙였다. “핵 문제는 안보와 관련된 문제로서 최고 지도부가 결정할 문제다. 북조선과 미국의 최고 지도부가 만나면 단숨에 해결될 수 있다.” 북한은 HEU 활동을 시인하는 동시에 양국 정상 간 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당시 켈리 차관보와 함께 방북했던 데이비드 스트로브 한국과장은 “강 부상이 핵개발 의혹을 시인하는 듯한 발언에도 놀랐지만 정상회담을 거론하는 것을 보고 북한 당국의 현실 인식에도 놀랐다”고 했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르며 선제공격도 가능하다고 한 상황에서 북한의 국제관계 인식이 비현실적이었다는 뜻이다.
켈리 차관보는 한국으로 돌아온 5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외교부 장관 공관에 모인 청와대와 외교부 대북관계 담당 고위인사 앞에서 방북 결과를 브리핑했다. 최 장관, 임동원 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보, 임성준 외교안보수석 등 당시 당국자들은 ‘핵 발언’에 몹시 놀라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개발 프로그램을 놓고 협상을 벌이는 상황에서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가동한다는 것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기만극’인 동시에 김대중(DJ) 정부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햇볕정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DJ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 라인은 그래서 미국의 주장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북한 석 달 만에 ‘핵 카드’ 모두 소진
북한이 2002년 10월 HEU 프로그램을 시인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악의 축’ 발언으로 북한이, 아니 김정일 체제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강석주의 발언은 제네바 합의가 표류하면서 ‘속았다’고 생각하던 미국에 대한 도발이었다. 한 달 뒤인 11월 미국은 곧바로 북한에 대한 중유(연간 50만 t) 공급 중단을 선언했다.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중유는 북한의 핵동결에 대한 대가였다.
12월 북한은 핵동결 전면 해제를 선언하며 맞섰다. 그리고 다시 한 달 뒤인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미국은 ‘선(先) 핵 포기’, 북한은 ‘선 불가침 협정’을 주장하며 평행선을 달리던 상태였다. 더구나 북한은 핵무기가 있다고 거듭 주장했지만, 미국은 ‘그럴 리가 없다’며 오히려 모른 척하며 북한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 모르게 영변 핵시설을 공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2004년 6월 3차 회담 이후 1년 가까이 4차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2005년 7월 북한은 6자회담 복귀를 갑작스럽게 선언하면서 6자회담이 재개됐다. 그동안 한국은 미국과 북한 사이를 중재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다. 5월 8일 노무현 대통령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6월 10일 부시 대통령과 각각 정상회담을 갖고 ‘6자회담 복귀’를 촉구했다. 6월 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 “체제 유지를 약속하면 복귀하겠다”는 대답을 끌어냈다.
운도 따랐다.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비둘기파’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힘이 실리며 대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9월 19일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 △미국은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다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2005년 7월 북한이 6자회담을 전격 수용한 것이 과연 ‘한국 외교의 승리’였을까. 당시 미국은 북핵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고자 준비 중이었다. 중유, 비료 공급이 끊기고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가 돈세탁 우려 기관으로 공시된 상태에서 추가적인 제재 조치가 취해진다면 북한은 버티기 어려웠을 것. ‘유화 제스처’를 취했을 가능성도 높다.
북한은 2006년 7월 장거리로켓 발사와 10월 핵실험으로 9·19 공동성명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한 핵을 폐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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