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못살겠다” 北 외화벌이 전사들의 아우성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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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북한의 해외 ‘외화벌이 전사’들이 지금처럼 죽겠다고 아우성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반면 북한에선 외화벌이에 파견해 달라고 자원한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모순적 풍경이다.

북한은 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를 ‘성대히’ 치르느라 기진맥진해 있다. 외화보유액은 바닥이 났고, 사람들도 워낙 들볶여 반쯤 얼이 나가 있다. 행사가 끝났으니 한숨 돌릴 법도 하지만 외화벌이 일꾼들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 2차 외화벌이 전투에 돌입한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당 창건 행사용 상납금을 못 채운 사람은 12월까지 마저 받아내겠단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셈이다.

김정은은 10일 연설에서 인민을 97번이나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인민의 형상은 사람이 아닌 건축물인 것 같다. 인민을 위해 제도를 개조하기보단, 화려한 건물이나 놀이장, 주택을 많이 짓는 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말이다. 정작 인민은 각종 건설에 동원돼 진이 빠져 쓰러진다. 이 역시 괴이한 모순이다.

김정은이 앞으로 인민 사랑을 보여준다고 뛰어다니는 것과 비례해 필요한 돈도 늘어날 것이다. 외화벌이 전사들이 젖 짜는 암소 신세를 면하긴 어려워 보인다.

해외 외화벌이 일꾼의 신분은 다양하다. 무역일꾼, 단순노동자, 의사와 정보기술(IT) 근로자 등의 기술 직군은 물론이고 외교관도 돈벌이에 나서야 한다. 당 창건 기념일을 맞은 올해 ‘충성의 자금’을 바치라는 압박은 사상 최고로 커졌다.

해외 파견자들은 지역과 업무에 따라 차별된 할당량을 부과받고 있다. 노동자를 제외하면 보통 한 사람이 연간 5000달러에서 많게는 수십만 달러까지 부과받는다. 수백만 달러씩 내야 하는 법인도 많다. 특히 중동이나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무기 밀매상이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 물론 따로 숨기는 돈도 제일 많지만 인맥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 소환되지도 않는다.

북한의 외교행낭이 면책특권을 활용한 밀수행낭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외교관들은 마약 금괴 등 각종 금지품을 운반하며 돈을 번다. 올 3월 현지 범죄조직을 위해 140만 달러어치의 금 27kg을 운반하다 체포된 방글라데시 북한대사관 1등 서기관, 5월 코뿔소 뿔을 중국에 넘기다 체포된 남아공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8일에도 쿠바산 고급 시가 3800개를 밀반입하려던 북한 외교관이 브라질에서 체포됐다. 북한 외교관들은 흡사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조직적 밀매단을 닮았다.

수단과 방법을 불문하고 돈을 잘 벌면 가족까지 데리고 나와 부러움 없이 잘살지만 이런 사람은 극소수다. 과거엔 돈 좀 못 벌어도 윗간부들에게 뇌물만 잘 주면 오래 있을 수 있었지만 올해부터 상황이 확 바뀌었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관용도 거의 없다. 벌써 숱한 외화벌이 일꾼이 돈을 못 벌어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죄로 소환됐다. 북에서 지긋지긋한 조직생활에 시달릴 생각을 하면 목숨 걸고 외화벌이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만 갑자기 돈이 잘 벌리긴 만무하다. 도망이라도 치자니 북에 남은 혈육이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2013년부터 지금까지 해외 주재관 46명이 한국으로 왔다니 꽤 많다. 돈 벌라는 압력이 커지는 것과 비례해 망명자는 더 많아질 것이다.

해외 노동자들도 올해 들어 월급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 간부들은 “조국에선 당 창건 행사를 위해 밤잠도 못 자는데 외국에서 이밥이라도 먹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라”고 큰소리친다. 집에 가겠다고 하면 “가서 편히 살 줄 아느냐, 강제노동을 시키겠다”고 협박받기 일쑤다. 진퇴양난의 노예 신세가 된 셈이다.

그럼에도 북한 내에선 해외에 나가겠다고 뇌물을 싸들고 간부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무능력자’들이 대거 소환되면서 빈자리가 많아진 까닭이다. “저를 파견해 주시면 돈을 더 벌어 바칠 자신이 있습니다”고 말은 하지만 속내는 따로 있다. 외국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데다 돈을 벌어도 좋고 못 벌어서 나중에 소환돼도 본전이기 때문이다. 해외 파견권을 쥔 간부만 요즘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뇌물에 살판이 났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이라면 북한에서 요즘의 해외 외화벌이만큼 치열하게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된 전례는 일찍이 없었다는 것이다. 돈 버는 능력을 입증하면 북한 여권을 갖고 해외에서 가족과 함께 잘살 수 있는 반면 능력이 없으면 곧바로 도태된다. 나중에 북한이 개혁·개방되면 해외에서 능력을 발휘한 무역일꾼 중에서 부자들이 대거 탄생하지 않을까. 물론 거액의 현상금이 내걸릴 밀수업자도 여럿 나오지 않을까 싶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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