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한국 외교사 명장면]<10·끝>남북 첫 이산가족 상봉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4일 03시 00분


꼬여가던 이산상봉 회담… 물밑선 ‘7·4 공동성명’ 꿈틀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위쪽 사진 왼쪽)가 특별 성명을 통해 ‘1000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북측에 
제의하고 있다. 1970년 정부가 광복 25주년을 계기로 북한에 이산가족 상봉을 전격 제의한 지 1년 만이다. 하지만 실제 
이산가족 상봉은 첫 제안이 나온 지 15년 만인 1985년에야 이뤄졌다. 서울에서 열린 첫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의 아들이 남측의
 어머니에게 ‘오마니’라고 부르며 오열하고 있다(아래쪽 사진). 동아일보DB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위쪽 사진 왼쪽)가 특별 성명을 통해 ‘1000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북측에 제의하고 있다. 1970년 정부가 광복 25주년을 계기로 북한에 이산가족 상봉을 전격 제의한 지 1년 만이다. 하지만 실제 이산가족 상봉은 첫 제안이 나온 지 15년 만인 1985년에야 이뤄졌다. 서울에서 열린 첫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의 아들이 남측의 어머니에게 ‘오마니’라고 부르며 오열하고 있다(아래쪽 사진). 동아일보DB
‘1000만 이산가족’은 남북 분단과 그 분단을 고착화시킨 6·25전쟁이 낳은 최대의 비극으로 평가된다. 분단의 아픔을 달래려는 첫 시도는 1970년 우리 정부의 공식 이산가족 상봉 제의로 이뤄진다.

그 뒤 1972년 7·4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그해 8월 평양에서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리는 등 이산가족 상봉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은 광복 40주년을 계기로 1985년에야 실현된다. 6·25전쟁 발발 이후로 따지면 35년 만에 남북으로 흩어져 살던 혈육의 첫 만남이라는 감격을 누리게 된 것.

‘데탕트 실리주의’ 힘입어 북한에 상봉 제안


정부는 1970년 8월 15일 광복 25주년을 계기로 북한에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 구상 선언’을 발표하면서 남북 간 군사 대결보다는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살게 하는가’라는 선의의 경쟁을 제의한다. 아울러 ‘인도적 문제의 해결과 통일 기반 조성에 기여할 획기적인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1971년 4월 12일 북측은 이에 화답한다. 허담 외무상 명의로 “남한의 집권 정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정당 사회단체와 개별적 민주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한 것.

그해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특별 성명을 발표한다. 그는 성명에서 “남북 이산가족들의 비극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고 강조하면서 “남북통일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에서 적어도 1000만 이산가족의 실태를 파악하고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 찾기 운동’만이라도 우선 전개하자”고 북한에 제의했다.

북측은 8월 14일 한국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오히려 “가족만이 아니라 친척·친우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자유 왕래를 실현시키자”는 파격적인 역제안을 내놨다. 이후 남북은 9월까지 판문점에서 5차례의 남북 적십자 접촉을 했고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에 합의했다.

적십자 회담이 7·4 공동성명으로 이어져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은 1971년 9월 20일 판문점 상설연락사무소 및 직통전화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후 1972년 8월 12일까지 25차례에 걸쳐 열렸다. 이 과정에서 남북은 통일에 대한 첫 합의인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을 이끌어 냈다.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 제9차 예비회담에서 남북은 이산가족에 친우까지 포함시킬지 등 범위를 놓고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때 중앙정보부 국장 출신인 정홍진 남측 대표가 김덕현 북한 차석대표에게 따로 만나자고 제의한다. 7·4 공동성명의 시발점이 된 비밀 접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비밀 접촉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972년 3월 정홍진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나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해 논의한다. 한 달 뒤인 4월엔 김덕현이 서울에 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고 간다. 5월 초 이후락의 방북이 이뤄지고 여기서 김일성과의 심야 면담이 성사된다. 5월 말에는 북한 박성철 제2 부수상이 서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다. 6월엔 남북이 7·4공동성명 초안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고비도 있었다. 서명 부분에 서로의 나라 이름을 넣는 데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다. 서로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체제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성명에 나라 이름은 들어가지 않았다.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라고 적는 선에서 타협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상봉 정례화해야 정치 개입으로 인한 중단 막을 수 있어”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리는 등 이산가족 상봉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지만 같은 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남북 관계는 다시 얼어붙는다.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은 광복 40주년을 계기로 1985년에야 이뤄진다.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첫 상봉은 생사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남북 방문단 50명 중 남측은 35명, 북측은 30명만이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 15년 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이뤄지지 못했다. 남북 대립이 격화한 탓.

2000년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나서야 상봉이 재개된다. 이후 남북 간에는 설과 추석을 계기로 한 2차례의 상봉이 꾸준히 이뤄졌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관계는 냉각기를 거치게 된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1년이 지난 2014년 2월에야 19차 이산가족 상봉이 열렸다.

북한은 순수한 인도적 행사인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쌀과 비료 지원을 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남북 적십자회담 수석대표와 적십자사 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이병웅 한서대 국제인도주의연구소장(74)은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로 정착시켜야 정치적인 변수 등으로 상봉이 중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이산가족#이산상봉#공동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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