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관과 뒤이은 방미외교로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 외교의 현실이 다시 한 번 부각됐다. ‘지정학의 귀환’으로 표현되는 오늘날 국제질서의 판도를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경, 기후변화, 에너지, 사이버테러 등 ‘연성 안보’ 분야에서 다자협력의 관행을 축적하고 신뢰를 쌓음으로써 지역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한국의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이 설 자리가 있는 것일까.
미국의 저명한 정치지리학자 존 애그뉴는 두 세기에 걸친 세계 지정학의 시기를 구분하면서 세 가지 공통 요소에 주목한다. 국제사회의 지배적 행위자로서의 민족국가, 영토에 대한 강대국 간 경쟁, 그리고 경쟁의 핵심 수단으로서의 군사력이 그것이다. 오늘날 동북아시아에서는 전통 지정학의 요소들이 그대로 발현되고 있다. 중국의 부상, 미국의 재균형 정책, 그리고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이 바로 이 지역에서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안보법제를 통과시킨 일본의 행보는 역내 지정학적 경쟁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강대국이 지배하는 전통 지정학의 게임의 법칙 아래서는 한국과 같은 중견국이나 약소국들의 입지는 좁지만 정보통신과 같은 기술 혁신은 지정학적 판도에 적지 않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요소다. 인권, 환경, 난민 문제와 같은 글로벌 이슈들을 둘러싼 초국가적 집단의 형성을 촉진하고 궁극적으로는 민족 국가를 초월하는 새로운 국제 행위자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역할 정체성’에 주목해야 한다.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이 추구하는 역내 다자협력 메커니즘은 지역 차원에서 한국의 역할을 통해서 강대국들 간의 지정학적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안보 분야에서 역내 협력의 결핍을 원자력 안전, 에너지 안보, 재난 관리와 같은 비전통 안보 분야에서 정부 및 민간 차원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역할 정체성에 기반을 둔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강대국들의 참여와 지지가 중요하며, 이러한 점에서 이번 한미, 한중 정상회담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각각 한국의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에 지지와 참여를 표명한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작년 국립외교원이 주최한 제1차 동북아평화협력포럼이 올해에는 세종연구소 주최로 27일부터 사흘간 서울에서 열린다. 북한을 제외한 동북아평화협력 구상 대상국 정부가 참여하는 고위급 회의도 동시에 병행 개최된다. 궁극적으로 통일을 향한 한국의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은 오늘날 전통적 지정학의 귀환에 ‘새로운 지정학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길이다. 무엇보다도 정부 및 민간 차원의 대화와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속시키는 일이 관건이다. 작년에 이어 이번 포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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