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3호/정치]
통폐합 대상 지역 반발 최소화, 늦어질수록 의정보고 할 수 있는 현역 유리
2012년 4월 치른 19대 총선에서 A후보는 8만2582표, B후보는 6만1098표, C후보는 3만1364표를 얻었다. 이 가운데 국회의원에 당선한 사람이 2명 있다. 누구와 누구일까. 만약 ‘5만 표 이상 득표해야 당선한다’는 절대평가 방식이었다면 A후보와 B후보가 당선자로 결정됐을 것이다. 그러나 현행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구 내에서 ‘최다 득표=당선’이라는 상대평가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 덕에 A후보와 C후보가 당선했다. B후보는 자신보다 869표를 더 얻은 상대 정당 후보가 있어 낙선했다. A는 서울 강남갑에서 당선한 새누리당 심윤조 의원이고 C는 서울 중구에서 당선한 새정치민주연합(19대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 정호준 의원이다. B는 서울 강서을에 출마했다 새누리당 김성태 후보보다 869표 적은 득표로 낙선한 당시 민주통합당 김효석 후보다. 표의 등가성 문제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는 득표의 많고 적음보다 상대 후보보다 1표라도 더 많이 얻어야 당선할 수 있는 선거구별 최다득표자를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다. 이 때문에 인구편차가 3 대 1로 크게 벌어지면 위 사례처럼 표의 등가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여 헌법재판소(헌재)는 2014년 10월 30일 국회의원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3 대 1로 허용한 선거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인구편차가 너무 커 인구가 적은 지역구에서 당선한 의원의 득표수보다 인구가 많은 지역구에서 낙선한 후보자가 얻은 투표수가 더 많은 경우가 생겨 투표 가치의 불평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헌재는 2015년 12월 31일까지 인구편차를 2 대 1 이하로 조정토록 했다.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1년이 넘었고, 제시한 인구편차 조정 시한은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2016년 4월 13일로 예정된 20대 총선도 이제 5개월 남짓 남았다. 그러나 아직 선거구 재획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야 대표가 법정 처리 시한인 11월 13일을 앞두고 11월 10일과 11일 두 차례 담판에 나섰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총선 출마에 뜻을 둔 입지자들. 앞으로 4년간 정치적 미래를 좌우할 총선이란 시험날짜는 다가오는데 아직도 시험범위가 정해지지 않아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수험생 같은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선거구 재획정이 늦어지다 보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총선 입지자들이 통폐합 가능성이 있는 인접 지역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충청권에 선거구를 둔 P의원의 경우 자신의 지역구 활동은 물론, 새벽에는 인접 지역구의 종교단체를 찾아다니며 얼굴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 충청권에서 활동하는 한 인사는 “P의원이 인접 지역구에 얼굴을 자주 내미니까 경쟁관계인 J 전 의원도 출마 예상 지역 외에 P의원 지역구 행사까지 참석하며 조직을 꾸리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겉으로는 아직 평온한데 물밑에서는 이미 치열한 선거 경쟁이 시작됐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호남권 Y의원도 자신의 선거구로 편입 가능성이 높은 인접 지역 행사에 참석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주요 당직을 맡은 Y의원은 직책상 고유 업무 수행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지역에서는 ‘사전 표밭갈이’로 인식하고 있다. 호남권 또 다른 현역 K의원도 ‘상임위원회’ 활동을 핑계로 자신의 지역구가 아닌, 선거구 조정으로 선거구 편입 가능성이 높은 인접 지역구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고 한다. 모두가 지난해 헌재 결정 이후 나타난 현상들이다. 호남 정가 한 인사는 “인구편차를 2 대 1로 줄이자면 호남 농어촌 지역구는 대부분 선거구 조정 대상 지역에 포함된다”며 “그러다 보니 마음이 바쁜 의원들이 인접 지역구 행사에까지 참석해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농어촌 선거구 통폐합 지역이 많은 영남권 사정도 마찬가지. 대구·경북에서 활동하는 한 지역 인사는 “선거구 재획정이 늦어지면서 선거구 조정 대상 지역의 현역의원들이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지역을 선택적으로 집중해 의정보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2개, 또는 3개 시군이 한 선거구로 묶인 통합선거구의 경우 현역의원이 대부분 연고가 있는 출신 지역 활동에 주력하는 것. 시군 통합선거구를 둔 L의원은 출신 지역인 시에 집중하고, 3개 군이 한데 묶인 선거구를 둔 K의원은 자신의 고향에 좀 더 신경 쓰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선거구 조정 대상 지역, 물밑 신경전 치열
부산·경남권 사정도 비슷하다. 경남권에서 활동하는 한 인사는 “늦어도 예비후보 등록 전까지는 선거구가 획정되지 않겠느냐”며 “선거구가 어떻게 통폐합되든 강력한 지지기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먼저 연고가 있는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총선 입지자들을 더욱 불안케 하는 것은 선거구 재획정뿐이 아니다. 유동적인 공천 방식 또한 불안 요인 가운데 하나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를 공천 원칙으로 강조하지만 실제 공천이 오픈프라이머리로 이뤄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만 선거구 재획정이 늦어지면서 현역의원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구·경북권 한 인사는 “대구·경북은 청와대 주도로 큰 폭의 현역 교체가 예상되는데, 선거구 재획정이 지연되면서 현역에게 다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역의원은 의정보고회 등을 통해 유권자 접촉 기회가 많기 때문에 정치 신인에 비해 분명 유리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선거구 재획정은 해당 지역 입지자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 하지만 선거구 재획정을 해야 하는 여야 지도부에게는 적잖은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는 문제다. 매번 선거구 통폐합이 결정되면 불이익을 받게 될 지역 유권자와 입지자들이 거세게 반발해왔다. 법정 시한이란 초읽기에 몰려서야 여야 지도부가 뒤늦게 머리를 맞대고 선거구 조정에 나선 이유가 ‘반발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총선 120일을 앞둔 12월 15일부터 총선 예비후보들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예비후보로 등록한 뒤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선거구가 재획정되지 않으면 큰 혼란이 불가피하다.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깜깜이’ 선거구에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선거운동을 하게 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기 때문. 아무리 늦어도 예비후보 등록 전까지 선거구 재획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법정 시한을 넘기는 것은 위법한 것이지만, 해를 넘기게 되면 헌재 결정까지 위반하는 위헌 국회가 된다.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5.11.18.~11.24|1013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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