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시절, 둔탁한 VCR에 까만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입을 헤 벌린 채 영화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를 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어른이 되면 진짜 저렇게 신기한 물건들이 나올까?’ 어린 가슴은 쿵쾅 뛰었다.
오랜 경기 침체로 모든 것이 ‘기승전일자리’로 통하는 요즘에는 연간 두 자릿수씩 고도성장을 하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리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다. 정부가 ‘까라면 까던’, 그러니까 관 주도의 일방적인 국정 운영이 당연하던 그 시대는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한참 멀었다.
3차원(3D) 기술과 전자안경 등이 실제로 구현되면서 백 투 더 퓨처를 넘어서는 기술 발전을 이루는 동안 우리 정치도 많이 발전했다. 군복을 입은 사람만 대통령이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을 벗어나 다섯 번째 문민정부(文民政府)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도 꽤 달라졌다. 댐 건설을 예로 들어보자. 예전에는 국가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댐을 만들어야겠다고 ‘결단’을 내리면 곧바로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수몰(水沒)됐다. 그러나 이제는 지역 주민과 지방자치단체, 환경 전문가, 시민단체 등 수많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대공약수를 찾아야 한다. 정책 결정과 집행의 패러다임이 거버넌스 체제로 바뀐 것이다.
거버넌스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대목은 ‘협치’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협업, 소통, 네트워크를 통해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만큼 절차적 정당성이 정책 결정 과정 곳곳에 스며들어야 한다.
최고 정책 결정권자가 보기에 역사 교과서가 잘못됐다면, 그래서 법령을 뜯어고쳐가면서 국정 체제로 바꾸고 싶었다면, 먼저 교과서를 둘러싼 사회 구성원들과 논의와 소통 과정을 거쳤어야 한다. 물론 그에 앞서 현행 검정체제하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돌아보고 대책을 찾아봤어야 한다. 국정 전환을 주장하는 이들은 “좌편향 교과서 집필진이 정부의 수정 명령을 따르지 않고 소송을 제기하더니 심지어 항소까지 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국정밖에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게 우리나라 법이 보장한 3심제의 시스템이다. 그들이 보기에 복장이 터지니 다른 법령을 바꿔버리겠다는 방식은 더 문제다.
지난해부터 국정 전환의 군불을 때던 청와대와 여당은 일사천리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였다. 교육부는 행정예고와 의견수렴 등 각종 요식행위로 발을 맞췄다. 의견수렴 결과 반대가 훨씬 많은 것도 이들의 안중에는 없다. 국가가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데 딴죽을 거는 이들은 ‘편향된 교과서로 아이들의 혼을 흐리려는 무리’일 뿐이다.
정책의 결정 과정이 이 지경이었다면 최소한 집행 과정이라도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우려한 대로 당정은 집필진조차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태세다. 인터넷에는 “집필진도, 집필기준도 비공개라니 이러다가 교과서도 비공개하겠다”, “복면가왕(복면으로 신분을 숨기고 노래 대결을 하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니 복면집필진이 나섰다”는 조롱이 넘쳐난다.
백 투 더 퓨처를 보던 날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중년이 된 내 가슴은 그날처럼 쿵쾅거린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어떻게 행정이 이렇게 퇴보할 수 있나’라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나에게 ‘종북 좌빨’이라 할 수도 있다. “이래서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고 혀를 찰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책 수준에 참담함을 느끼는 나는, 국정 역사 교과서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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