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로 파격 경제개혁… 임기말 외환위기로 추락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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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명-암 엇갈린 경제 성적표

빈소 찾은 MB-김무성-문재인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여야를 망라한 유력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위쪽 사진부터 침통한 표정으로 애도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 ‘정치적 아버지’의 서거 앞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닦고 있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민주화의 큰 산을 잃었다”며 헌화하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사진공동취재단
빈소 찾은 MB-김무성-문재인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여야를 망라한 유력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위쪽 사진부터 침통한 표정으로 애도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 ‘정치적 아버지’의 서거 앞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닦고 있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민주화의 큰 산을 잃었다”며 헌화하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사진공동취재단
경제 분야에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수많은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는 진 장수’로 평가된다. 금융실명제 실시, 부동산실명제 실시,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 굵직한 개혁과제를 전격 도입해 정권 초기에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반면 관행으로 굳어졌던 대기업의 무분별한 확장 경영을 수술하지 못하고 준비가 미흡한 상황에서 외환시장을 개방하는 바람에 정권 말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았다.

경제 전문가들은 “투명한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데 있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큰 공을 세운 혁신적 성향의 대통령”이라면서도 “과거 고도성장을 이끌었지만 나중에는 경제의 부담으로 작용한 재벌 시스템의 개혁을 적기에 추진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 경제 질서 바꾼 금융·부동산실명제

금융실명제는 김 전 대통령이 처음 주창한 제도가 아니다. 1982년 발생한 ‘이철희 장영자 부부의 어음사기 사건’ 이후 금융실명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수차례 제기됐지만 금융시장 위축 등 부작용이 크다는 우려에 막혀 번번이 좌절됐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했다. 대부분 부처의 장관들이 몰랐을 만큼 전격적이었다. 담화문에서 그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단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전까지 당연시됐던 가명거래를 원천적으로 차단했고, 남의 이름을 훔쳐서 거래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까지 둬 기존 금융거래 질서를 일거에 바꿔놓았다. 금융실명제 발표 직후 이틀 만에 종합주가지수가 10% 가까이 하락했지만 1주일 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실명 전환 이후 갈 곳을 잃은 자금이 부동산에 쏠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1월 6일 부동산실명제까지 도입했다. 불과 3주일 만에 입법절차를 마치고 시행에 돌입해 부동산에 검은 자금이 숨을 여지를 최소화했다.

김영삼 정부 초기 재무부 세제심의관을 지낸 김진표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사회를 투명하게 만들고 재정의 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 경제성적표 뒤에 숨은 부실은 놓쳐

정권 초기의 ‘깜짝’ 개혁 정책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한때 90% 선을 넘겼다. 경제지표도 호조세였다. 1993년 6.8%였던 경제성장률이 1995년에 9.6%까지 치솟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 선을 넘었다. 실업률은 떨어진 반면 물가는 안정세를 이어갔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김영삼 정부는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당시 정부는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OECD 가입 직후 한국 경제는 치명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이어 4월에 삼미그룹이 무너졌고, 7월에는 기아자동차가 부도를 냈다. 해태그룹, 쌍방울그룹, 한라그룹도 차례로 위기를 맞았다. 곪았던 상처가 터진 것이다.

특히 일부 대기업의 선단식 경영으로 쌓인 부채가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었는데도 정부가 구조조정에 손대지 못한 점이 결정적 실책이었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를 감수하면서까지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려 애쓰다가 외환보유액을 소진하기도 했다.

1997년 1년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들이 금융회사에서 빌린 자금은 30조 원 이상이었다. ‘기업 도산→해외 금융기관의 상환 요구→국내 자금 경색→가계 도산→경제 불황’의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한국 경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22일 특별담화를 통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사실을 밝혔다.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18년 뒤 같은 날 김 전 대통령은 영면했다. 1997년 당시 한국은 국가 부도 사태를 면했지만 혹독한 IMF 관리 체제에 돌입하게 됐다.

○ “경제위기 선제대응 못한 점 아쉬워”

전직 경제관료들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경제정책을 전적으로 관료에게 맡기면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 대통령으로 평가했다. 다만 경제 시스템의 곪은 부분을 파악해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최악의 사태를 초래했다고 아쉬워했다. 전직 고위 관료는 “1997년 11월에 김 전 대통령과 통화할 당시만 해도 외환 쪽이 어렵다는 정도로만 알았지 그 심각성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전했다.

1994년 말∼1995년 말 경제정책을 총괄한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시대정신을 빠르게 파악하는 혁신가적 기질이 탁월했다”라며 “외환위기로 이미지가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경제적 공과에 대해서도 정확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종=홍수용 legman@donga.com·손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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