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26일 남북 당국 간 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에서 내놓은 수석대표 ‘카드’는 차관급 대표였다. 북한이 거부 반응을 보인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 간 ‘통-통 라인’을 고집하지 않고 당국 회담 성사를 위한 현실적 방안을 택한 것이다. 남북 정례대화의 틀을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 것이다.
북한도 이날 실무접촉에서 ‘차관급 당국 회담’이라는 큰 틀에서 이견이 없었다. 다만 차관급 회담에 나설 북한 인사의 급을 두고 남북이 시각 차이를 드러냈다. 당국 회담의 격과 의제에 대해 남북이 완전히 평행선을 달린 것은 아니지만 차관급의 격과 당국 회담의 의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인 것. 결국 남북은 여타 실무적 문제들은 판문점연락사무소를 통하여 협의하기로 했다.
이날 남북 실무접촉 수석대표인 김기웅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1급)과 북한 황철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부장은 만났다가 헤어져 서울과 평양의 훈령을 기다리는 마라톤협상을 반복했다.
○ 정부, 협상서 ‘차관급 회담’ 카드 제시
정부는 ‘통-통 라인’이 당국 회담의 수석대표로 이상적이라고는 생각해 왔다. 남북 관계를 책임지는 수장들이 만나야 실질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틀이 정례화되면 합의 사항을 이행할 분야별 분과위원회로 넘기는 운영체계를 만들겠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김양건이 장관급보다 격이 높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양건만 고집해 소모적 논쟁을 되풀이하기보다는 당국 회담 개최를 통한 실질적인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실리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셈이다. 홍 장관이 나서지만 김양건이 안 나오는 상황이 벌어지면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만큼 아예 차관급으로 출구를 찾기로 한 것.
북한도 이날 회담에서 차관급인 내각 부상을 당국 회담 수석대표로 들고 나왔다. 하지만 한국 측은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생각한 반면 북한은 청와대 인사가 당국 회담 수석대표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남북은 합의문에 당국 회담에 나설 차관급 인사가 누구인지 적시하지 못했다. 당국 회담 개최까지 남북이 판문점 직통전화를 통해 협의하기로 했으나 실무접촉 과정으로 볼 때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당국 회담 개최 장소는 8·25합의에서 서울-평양 교차 개최를 명시했으나 북한 측이 교차 개최에 난색을 표하면서 개성공단으로 확정됐다. 북한은 개성공단 금강산 등을 회담 장소로 주장해, 개성공단 확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의제도 양측 의견이 달라 쟁점이었다. 한국 측은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제시한 반면에 북한은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꺼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남북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현안 문제”라는 포괄적 의제를 정하는 수준에서 합의했다. 북한은 회담이 시작된 뒤 “남측이 북핵, 인권, 군사훈련 등을 통해 대북 적대 대결 자세를 버리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 것으로 전해졌다.
○ 차관급 당국 회담으로 실질 협의 의문도
우리 정부가 당국 회담 성사를 위한 실리를 찾은 것으로 풀이되지만 차관급 당국 회담으로 남북 간 산적한 현안을 실질적으로 풀어가기 어렵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8·25 합의에서 서울 평양 교차 개최를 통해 당국 회담을 정례화하기로 했음에도 개성공단으로 장소를 정한 것은 남북이 8·25 합의를 깨뜨린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차관급 당국 회담이 자칫 일회성에 그칠 수도 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이날 북측 대표단은 YS에 대한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북한 관영매체들도 이날까지 YS 서거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나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선 조의를 표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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